한 해가 저물어갈 때, 그것도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이면 사람들은 부쩍 상념에 젖는 일이 많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은 제대로 된 게 거의 없고, 그저 세월만 보냈다는 자탄이 나오는 것도 이 즈음이다. 더구나 타향을 떠돌며 사는 나그네 신세라면, 올 한 해는 그럭저럭 보냈지만 내년은 어디를 떠돌게 될지 막막한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반평생을 방랑자로 산 김시습(金時習)에게 연말의 저녁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녁 단상(晩意)
萬壑千峰外(만학천봉외) 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밖으로
孤雲獨鳥還 (고운독조환) 한 조각 구름과 한 마리 새가 돌아갈 뿐이네
此年居是寺(차년거시사) 올해는 이 절에서 묵었지만
來歲向何山 (내세향하산) 내년에는 어느 산으로 향해갈까?
風息松窓靜(풍식송창정) 바람이 멈추니 소나무 창이 고요하고
香銷禪室閑(향소선실한) 향은 다 탔고 선실은 한가롭네
此生吾已斷(차생오이단) 이 삶을 나는 이미 속세로부터 끊어냈기에
棲迹水雲間(서적수운간)물과 구름 사이에 깃들어 산 자취만 남네
방랑의 삶을 살다 간 시인이 잠시 기거하며 머문 곳은 첩첩산중에 위치한 작은 절이었다. 만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곳이니 오지도 이런 오지가 있을 수 없다. 절의 스님도 출타한 듯 기척이 없고, 오직 구름 한 조각과 새 한 마리가 눈에 보이다가 그마저 돌아 가고 말았으니 적막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다.
한 해가 저무는 연말에, 하루가 저무는 저녁에 첩첩산중에서 홀로 떠도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보는 시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더구나 곧 닥칠 내년의 거처는 오리무중으로 알 수도 없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시인을 둘러 싼 것들은 오직 적막함 뿐이다. 멎은 바람과 고요한 소나무 창, 다 탄 향과 한적한 선실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을 속세르ㅡ부터 이미 차단하고 있었으니, 아무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새처럼 서식한 흔적이 물과 구름 사이에 남아 있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도리어 한 치 앞을 모르는 불확실성이 삶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속세와 절연하고 사는 방랑의 삶은 불확실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꼭 나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 안에서 최소한의 인위로 자연에 순응하려는 삶의 자세야말로 가장 확실한 삶의 방법일지도 모를 일이다.
/서원대 중국언어문화전공 교수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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