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초계 변씨
25. 초계 변씨
  • 연숙자 기자
  • 승인 2008.03.21 22: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말에 읽는 문중 그뿌리를 찾아서
지극한 孝心… 문중의 지지대 역할

1500년쯤 변충남 이거… 청원 비상리에 터잡아

효자각·효행사적비 등 선조의 행적 고스란히

기러기 형상 중 머리에 해당되는 비상리 백촌 마을은 비중리의 안정 나씨와 함께 충과 효의 가문으로 쌍벽을 이룬 초계변씨의 세거지다.

초계 변씨 문중이 비상리에 터를 잡은 것은 1500년경 변충남이 이거로 시작되었는데, 구전에 의하면 당시 돌림병을 피해 비상리로 이거 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인근 마을의 안정 나씨와 파평 윤씨 문중과는 혼인 관계로 맺어지며 지역의 씨족 세력으로 위상을 정립해 나간다.

경남 합천 초계가 본관으로 초계 변씨의 성씨 유래로 2007년 내수읍지를 살펴보면 "변씨는 원래 중국 주나라 문왕의 여섯째 아들이 후에 노나라 변읍에 봉해지자 성을 변이라 했다고한다.

그후 후손 변원이 당나라 때 예부상서로 8 학사 중 한 자리를 차지했고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그는 사신으로 오면서 '효경' 한 질을 갖고 오자, 경덕왕이 그의 학식에 감동해 왕자의 스승으로 삼아 신라에 남아있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신의 후손인 변정실이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으로 초계군에 봉해지며 그를 시조로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문중 일각에서 변한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지명에 의한 자득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청원군 구녀산 북서쪽에 위치한 비상리 백촌 마을 입구에는 오랜 느티나무가 문중 유적과 함께 오랜 세월을 품고 서 있다.

우선 백촌이란 마을 지명에서 백(栢)은 초계변씨와 깊은 관련있다. 입향시조 변충남은 이곳에 터를 잡고 잣나무를 심어 가꾸었다고 한다. 이러한 잣나무와의 인연으로 잣나무 백(栢)자를 사용했는데, 후손들의 호에도 백음 변경복, 백은 변시석 등 백자를 넣어 지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촌도 잣나무와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선조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1991년에 조성된 백음 변공 유적지가 남아있으며, 이곳에는 변경복의 효자각과 변경복 효행사적비, 그리고 효자 변경복지려, 변익하 효자각 등이 있다.

변경복 효자각은 극진한 어머니를 모신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선조 35년(1602년)에 세운 것으로 여지도서 청주목 효자조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이어 손가락을 잘라 병환의 부모를 살린 변익하가 시묘살이로 병을 얻어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이 정조 11년(1787년)에 세워졌고, 1997년에는 극진한 어머니 간호와 빈소를 지킨 변종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유허비각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500여년 동안 뿌리내리며 이어온 문중의 역사에서 효 정신이야말로 문중의 정신적 지지대 역할을 물론, 문중의 기반을 다지며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상리외에도 가덕면과 우산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인물 & 인물

자손 대대로 벼슬길 오른 명문가

시조 변정실 고려 문하시중 지내

현재 걸출한 인물 각계각층 포진

시조 변정실은 고려 성종때 문과에 합격하여, 문하시중에 오르며, 나라에 공을 세워 초계군에 봉해진다. 이로써 초계를 중심으로 단단한 기반을 다진 문중은 변계량이란 학자를 배출하며 중앙 정치에 나선다.

검교판중추원사 변옥란의 아들인 변계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태종 초에 성균관악정,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한 뒤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그리고 세종 2년 집현전이 설치된 뒤에는 대제학을 역임하는 등 조선초기 관인문학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러한 이력으로 보아 세종이 안질을 고치기 위해 초정약수 터 근처에 행궁을 지은 것도 변계량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중에선 추측하기도 한다.

조선조 인물로 성균관 대사성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변효문과 개령현감을 지낸 변심, 경기전참봉을 지낸 변승종이 있다.

그리고 비상리의 입향 시조인 변충남은 증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를 지내며 비상리에 초계변씨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그의 아들 변경복은 임진왜란이 나자 90세 노모를 업고 피난길에 올라 왜장을 감화시키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변경복의 손자 변시석은 효성이 두텁기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그의 동생 변시보와 변시우는 각각 선교랑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비상리 요골에 이거 해 후손을 잇는다.

또 변관하와 변인하는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1728년 청주에서 600여명으로 창의를 일으켜 공신에 추대된다.

변익하는 충의 정신도 대단했지만, 타고난 효자로 35의 젊은 나이에 시묘살이로 병들어 죽는다. 이에 정조 임금이 정려를 내린다.

그런가 하면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자 1960년 국계서원을 복원한 변영설과 북일면의회의원으로 지역 발전에 앞장선 변영태, 현대 효자로 알려진 변종필씨가 있다.

대부분 문관 출신인 문중 인물들은 학자의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인물로는 법조세무계에 변종춘 변호사와 변종선 세무사, 변재진 전 보건복지부장관, 경제계에는 변상면 우암새마을금고 이사장, 변종오 대신증권 이사, 변정수 전 내수농협조합장, 정치계에는 변재일 국회의원, 변종석 전 청원군수, 변장섭 청원군의회의장, 변영수 전 청주시의원, 문화예술계는 변영로 시인, 변광섭 한국공예관 총괄부장, 교육계에는 변현규, 변충규, 변종락, 변광규 전 교장, 변종화 충주대 교수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