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꽃이다
너도 꽃이다
  •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 승인 2025.03.2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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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봄바람이 분다. 애써 흔들리지는 않기로 했다. 봄바람 불면 꽃은 피는데 그 꽃에 내가 아프다. 코 끝 찌르는 향기에는 멀미가 나고 황홀한 꽃잎은 노안임에도 뚜렷하여 눈이 부시다. 맡고 보고 있노라면 다시는 뜨거워질리 없으리라 여겼던 공허한 가슴도 하릴없이 뜨거워져 후끈거린다. 놔둔다고 저절로 식혀질 온도도 아니다. 소리 없는 속울음이 며칠 내 이어져야 이내 식는다. 몇 해 전부터 그러던 것이 작년까지 이어졌다. 이 증상은 봄바람과 함께 시작되어 봄이 끝나야만 멈춘다. 혹여 전생을 본다던 노인의 말대로 전생에 기생이었던 자의 업이요 못다 푼 한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 생에는 녹을 업도 풀릴 한도 아니라 여겨 업고 안고 가려 했다. 스스로는 이 모는 것을 봄병(春病)이자 화병(花病)이며 그로인한 꽃몸살이라 진단했다. 그러나 이토록 복잡다단한 증상에 대한 의사의 소견은 의외로 간단했다. 갱년기다.

갱년기의 남자는 참으로 연약하여 봄바람에는 베이고 봄볕에는 데이고 봄꽃에는 눈이 머는 법이다. 앓느니 피하기로 했다. 일부러 꽃 찾아 나서는 길은 없으리라 다짐하고 올봄은 꽃구경도 미뤘다. 꽃에 홀려 자칫 한 눈이라도 팔면 꽃길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하여 올해는 봄소식은 전하지도 말라 했거늘 굳이 전한다. 남도에 사는 지인이 뒤란에 매화가 피었다며 아침부터 요란을 떤다. 구태여 사진까지 찍어 보냈다. 읽고도 한동안 답이 없자 도리어 묻는다.

“피었나요?” 필자의 사무실 창가에 있는 매화분의 개화여부를 물어 온 것이다.
“아직요.” 짧게 답을 하다가 어렴풋한 기억 하나 스친다. 매화분에 꽃이 피었다며 아웃포커스로 사진 찍어서 그이에게 보냈던 나 혼자 요란하던 어느 봄날의 아침이 있었다. 내가 일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 그이도 내게 봄소식을 전한 것이다. 퉁명스럽게 느꼈을지 모를 짧은 대거리가 미안하여 “올해는 좀 늦네요.”라고 덧댔다.

춘풍선발원중매 (春風先發苑中梅)
앵행도리차제개 (櫻杏桃梨次第開)

매화사진에 딸려온 글이다. 시(詩)의 한 구절이다. 제목은 춘풍(春風)이고 이백과 두보와 한유와 함께 묶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불리는 당나라의 시인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가 썼다. 우리말로 풀자면 이렇다.

‘봄바람에 궁원의 매화가 먼저 피고 앵두 살구 복사 배꽃이 차례로 피네.’

봄이 오는데도 순서가 있다고 낙천은 말한다. 봄은 바람 타고 오나 순서는 꽃이 정한다. 봄에 꽃이 피는 순서라 하여 춘서(春序)다. 위의 시 춘풍(春風)에서 유래했다. 매화는 봄바람에 피는 것이 아니라 매화가 봄바람을 부른 것이라 했던가. 제 아무리 춥고 눈이 와도 매화가 피면 그때가 봄이다. 그래서 제일춘(第一春)이다. 매화는 눈꽃과는 다퉈도 봄꽃과는 다투지 않는다. 매화가 피면 봄이고 매화가 져도 여전히 봄이다. 매화가 꽃 떨궈도 봄은 아직 가지도 아주 가지도 않았노라고 나도 봐달라며 앵행도리(櫻杏桃梨) 줄지어 얼굴을 내민다. 끝이 아니다. 봄꽃만 꽃이냐며 앵행도리도 꽃 떨구면 진달래 철쭉 아카시아 이팝나무 찔레꽃 불두화가 줄지어 눈부시게 흐드러질 것을 나는 안다.

바람은 공평한데 꽃피는 시기가 다른 이유가 있다. 수종마다 성장하고 꽃을 피우기 위해 필요한 열량인 적산온도(積算溫度)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적산온도는 생육일수와 일평균기온을 곱한 값이다.

“꽃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건 그때를 달리하여 피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그만의 적산온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계절이 있고 그러므로 꽃 피는 시절이 다르다 말씀하신다. 존경하는 스승님이자 스님이시고 수행자이시며 작가이자 무엇보다 정원사이신 마야사 주지 현진스님의 꽃 같은 법문이다.

울지마라. 너도 꽃이다. 걱정마라. 너도 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