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원불교 교무님들과 제주도에 다녀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그 동안 뜨거웠던 머리를 잠시나마 식힐 수 있었다. 지명을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애월 쪽 바닷가였던 것 같다. 바다에는 거대한 풍차가 있었고 바다 위에 나무로 만들어진 산책길이 있었다. 신기한 바닷길을 걸으며 풍차들을 바라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풍차들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풍차가 돌고 있었는데 중간 중간에 돌지 않는 풍차들이 있었다. 내가 궁금해 하자 한 교무님이 말씀해 주신다.
“돌지 않는 풍차는 이미 축전이 가득 찬 것이에요. 더 돌아도 만들어낸 에너지를 담을 곳이 없기 때문에 돌지 않는 거라네요.”
내 마음 속 풍차에 대한 낭만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풍차는 바람이 불면 그냥 돌아야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바람이 불지 않아 돌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어도 바람이 불고 있는데 멈춘 풍차는 납득이 되지 않는 나였다. 다시 풍차들을 보니 돌지 않는 풍차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았다. 풍차는 관상용이 아니라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가 바라보며 좋다고, 나 보기 좋으라고 풍차가 돌 수는 없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풍차도 쉬어야 할 때는 쉬어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지 않는 풍차를 보며 원불교의 좌선 공부를 생각해 본다. 원불교의 좌선은 화두선이 아니라 단전주선이다. 화두선은 화두(의두)를 머릿속에 생각하며 끊임없이 궁구하는 것이다. 원불교의 단전주선은 머릿속은 비우며 오직 단전으로 호흡을 하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할 뿐이다. 단전주선의 장점은 선을 하는 그 시간만큼은 정신의 작용을 멈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을 끊임없이 사용하며 산다.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에도 그렇고 일을 할 때에도 정신을 태우며 산다.
잠시 쉬는 시간에는 스마트 폰을 보며 정신을 혹사시키고 산다. 잠을 잘 때에 정신을 쉬어 주어야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꿈을 꾸기 때문에 정신이 쉬지 못한다.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기억하지 못 할 뿐, 무조건 꿈을 꾸면서 잔다고 한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수면을 논 렘 수면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24시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정신을 혹사시키며 살고 짧은 시간만 정신이 쉰다는 것이다. 정신은 억지로라도 쉬어 주어야 한다. 마치 축전을 다한 풍차가 돌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의 혹사된 정신은 억지로라도 쉬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억지로 정신을 쉬어 주는 방법이 원불교의 좌선이다.
1. 좌선의 요지(坐禪-要旨)
대범,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을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어 화기를 내리게 하고 수기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리라.
<중략> 그러므로, 우리가 노심 초사를 하여 무엇을 오래 생각한다든지, 또는 안력을 써서 무엇을 세밀히 본다든지, 또는 소리를 높여 무슨 말을 힘써 한다든지 하면 반드시 얼굴이 붉어지고 입 속에 침이 마르나니 이것이 곧 화기가 위로 오르는 현상이라, 부득이 당연한 일에 육근의 기관을 운용하는 것도 오히려 존절히 하려든, 하물며 쓸데 없는 망념을 끄리어 두뇌의 등불을 주야로 계속하리요. 그러므로, 좌선은 이 모든 망념을 제거하고 진여(眞如)의 본성을 나타내며, 일체의 화기를 내리게 하고 청정한 수기를 불어내기 위한 공부니라.(원불교 정전 제3 수행편 제4장 좌선법 中에서)
낮은자의 목소리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