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photo/202502/830430_329759_1457.jpg)
알맞게 식힌 물을 부어 차를 우린다.
물은 불을 만나 제 몸의 열기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온도를 내린다. 찻잎은 그 순화된 물을 만나 제 몸을 푼다. 돌돌 말아 깊숙이 감춰두었던 색, 향, 미를 고스란히 풀어놓는다. 찻잎을 만난 물과, 물을 만난 차는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신이 주신 선물’ 천상의 차로 거듭난다. 차는 물의 신(神)이 되고, 물은 차의 몸(體)이 되어 맑게 우러난 찻물을 찻잔에 가만히 따른다. 조르르 흐르다 또르르 굴러 마지막 똑똑 떨어지는 찻물 소리가 영롱하다. 순백의 찻잔에 얼비치는 비췻빛 찻물을 들여다보니 침침한 눈이 또렷해진다. 코를 스치는 깊고 푸른 향이 나를 감싸고돈다. 달무리처럼 온화하다. 첫 모금을 머금으니 배릿하고 향긋하다. 두 번째 잔을 기울이니 목을 타고 가슴으로 퍼진다. 나머지 남은 잔을 마저 마시니 실핏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파고든다. 연거푸 몇 잔을 마시니 나른해진 몸이 날아오를 듯 가볍다. 이 순간만은 싫고 좋음도, 많고 없음도 가릴 것 없는 사무사의 맑은 기운뿐이다. 혼자 차를 마시는 이유다. 차를 마시며 나누는 담소는 호수에 떠있는 오리처럼 오순도순 다정하다. 물처럼 유연하고, 호수처럼 담담하고, 풍경처럼 평화롭다. 이야기는 무르익어도 조용하고, 평온한 가운데 물처럼 흘러 동중정(動中靜) 정중동(靜中動)의 차분한 경지다.
얼기 직전 차디찬 술병 뚜껑을 비틀어 딴다.
하늘로 치켜세웠다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얼은 것과 차가운 것의 경계를 뭉갠다. 술잔은 채워야 정이라며 넘치도록 따른 작은 잔, 큰 잔이 서로 이마를 부딪친다. 왁자한 건배사와 함께 단숨에 털어 넣고 다음 잔을 받아야 술맛이다. 술자리는 길수록 언성은 높아지고, 중언부언 혼돈의 경지에 이른다. 장마 뒤 뿌연 호수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 허우적거리는 오리가 된다. 목소리도 걸음걸이도 중심을 잃고 갈지자를 그려댄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
차도 술도 물이 빚는다.
차는 차갑게 태어나서 불을 담아 따스한 온기를 품는다. 그 온기의 힘은 넘치고 모자람 없이 열과 화를 다스려 중용의 덕을 선사한다. 산란한 심사를 가지런히 빗질하여 자기 성찰의 기회를 부여한다.
술은 시원하게 마셔서 열기를 발산한다. 그 열기는 체온을 높여주고 때로 화기를 부추긴다. 옹졸하고 쩨쩨한 이의 축 처진 어깨를 번쩍 들어 올려 두둑한 배짱을 선물하기도 하거니와 안하무인으로 취중무천자의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차와 술은 똑같이 불을 담은 물이요, 불을 건너온 물이다. 차도 술도 기다림의 산물이요, 향과 색을 담은 신비의 물이다. 차를 만드는 제다도 술이 거치는 주조도 법과 원칙의 통과의례를 밟는다. 차에는 다례가 있고 술에는 주도가 있다. 만들 때도, 다룰 때도, 마실 때도 예와 격을 갖춘다. 조절의 수위에 따라 격조를 높이기도 하고, 실추시키기도 한다.
차에 취하면 비움과 맑음의 대나무처럼 꼿꼿해지고, 술에 취하면 채움과 넘침으로 버드나무처럼 흐느적거린다. 차는 입안에 머금어 천천히 음미하는 맛이고, 술은 단숨에 넘겨서 화끈 달아올라야 맛이다. 차는 고요한 가운데 마음을 내리는 감마유요, 술은 호탕한 분위기 속에 기분을 끌어올리는 윤활유다. 차와 술은 하나같이 노동과 쉼을 연결하는 고리이며, 오늘의 휴식을 통해 내일로 가는 도약의 도구다. 소통과 친교의 오아시스며, 여유와 여가를 찾아가는 다리요, 갈증을 풀어주는 샘터다. 어떤 이는 차를 다반사로 마시다 특별한 날 술을 즐기고, 어떤 이는 술을 밥처럼 먹다가 특별한 날 체험하듯 차를 마신다. 차는 제대로 즐기면 신선의 경지에 오르기도 하고, 술이 사람을 마시면 아득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술 먹은 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선택과 절제의 묘가 약과 독의 바로미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