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첫눈
  • 전현주 수필가
  • 승인 2024.12.25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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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얼마 전 음성·진천 지역에 폭설이 내렸다. 첫눈이 기록적인 폭설이라니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날 나는 공교롭게도 진천 배티성지에 다녀와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눈 소식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B선생님을 모시고 함께해야 하는 자리였기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오래전부터 행사를 준비해온 분들은 이렇게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정성을 다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기에 꼭 참석하여 힘을 보태고 싶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눈길 운전은 처음이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국도로 내려서자 길은 더 미끄러웠다. 과연 서슬 퍼런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숨어들었다던 골짜기답게 성지에 가까워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골이 깊어질수록 눈은 더욱더 세차게 내렸다.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왔던 기억이 언제였던가. 그 와중에도 차창으로 보이는 눈꽃이 너무도 아름다워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 지레 겁먹고 오늘의 일정을 포기했다면 만나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운이 좋게 제설 차량을 만나 바로 뒤를 졸졸 따라가니 운전이 수월해졌다. 내 차 뒤로 기차처럼 긴 차량 행렬이 생겨났지만, 다행히 모두 제시간에 도착했다. 하지만 미사와 행사 내내 문득문득 집에 돌아갈 길이 걱정되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뿔싸. 점심 식사는 가파른 언덕을 100미터 정도 올라간 곳의 식당에 준비되어 있었다. 평지도 미끄러운데 우산까지 들고 선생님과 함께 언덕을 오르자니 고행길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부여잡고 설설 기다시피 하면서도 자꾸 웃음이 났다. 사람들도 모두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아름다운 나무 밑을 지날 때마다 감탄을 연발했다.

김이 폴폴 나는 따뜻한 점심을 먹으며 창문 밖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행복한 한 끼.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붉고 자잘한 수많은 홍시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반짝이는 등불처럼 보였다. 오랫동안 기억될 한 장면이 될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재난 문자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에서 눈길 미끄럼으로 인한 추돌사고가 양방향에서 모두 발생한 모양이었다. 결국 우회도로로 돌아 돌아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하니 맥이 탁 풀렸다. 선생님도 온 힘을 쓰셔서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실 것만 같아 걱정이었다.

TV에서는 비닐하우스와 노후주택이 무너지고 축사가 붕괴했다는 뉴스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애써 가꾼 채소와 꽃들이 무너진 하우스 위로 내린 눈에 덮여 모두 얼어버렸다고 한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눈이 피해를 키운 모양이었다. 얼마나 막막할까.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이 순간에도 도움의 손길이 절실할 것이다. 빠른 복구와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어린 시절에는 눈이 내리는 게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종이에 검은색 매직으로 등압선을 그리며 일기예보를 하던 김동완 아저씨가 내일 눈이 온다고 예보하면, 수시로 창문에 매달려 가로등 불빛을 내다보며 눈을 기다렸었다.

언제부터인가 눈 소식이 들려오면 걱정부터 앞서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도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는 증빙일까. 아니면 이미 너무 많은 고충을 알아버려서일까. 눈이 내린 날, 온 세상이 고요하면서도 훤한 아침이 그리도 좋더니 사람이 영 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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