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지에서 들려온 증언과 기억
망명지에서 들려온 증언과 기억
  • 반영수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선임전문관
  • 승인 2025.02.05 1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포럼

역사는 인간이 폭력과 억압 속에서 자유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 보여주는 증언이다. 그리고 그 투쟁의 흔적은 종종 기록물로 남아 후세에 교훈과 영감을 준다. 1918∼1945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망명자들의 정기간행물 컬렉션은 바로 그러한 역사를 대표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컬렉션은 단순한 기록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망명자들의 삶과 투쟁, 그리고 희망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이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 격동의 시대를 가져왔다. 1917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은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지만, 이는 동시에 내전과 혼란을 야기했다. 이어진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은 이 지역에 더 큰 고통과 파괴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반혁명 세력, 지식인, 예술가, 소수 민족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등 세계 각지로 흩어져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낯선 땅에서 망명자들은 생존 그 이상의 것을 갈망했고, 자신의 언어,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열망은 정기간행물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신문, 잡지, 뉴스레터 등 다양한 형태의 정기간행물은 망명자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망명자들에게 고국의 소식을 전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망명 공동체 내부의 의사소통을 촉진하고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망명자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거나, 고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냈으며, 망명 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지원 같은 정치적 활동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역시 정기간행물을 통해 이루어졌다. 모국어로 된 문학 작품, 예술 작품, 역사 연구 등을 발표하며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으며, 망명지의 문화를 소개하고 현지 사회와의 교류를 촉진하기도 했다.

1918∼1945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망명자 정기간행물 컬렉션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400여 종의 정기간행물, 10만여 건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 컬렉션은 당시 망명자들의 삶과 사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보고로,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등 다양한 언어로 발행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들의 다양한 배경과 관심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당시 사회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정기간행물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불안감, 정체성 혼란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있는가 하면, 망명 공동체 내부의 갈등과 협력, 망명지 사회와의 관계 등 사회적 역학 관계도 엿볼 수 있다. 혁명, 내전, 세계대전 등 격동의 시대를 겪은 망명자들은 정기간행물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분석했으며, 이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들의 정기간행물 컬렉션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이 기록물은 전 세계적인 난민 문제와 망명자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준다. 현대의 난민들 역시 과거의 망명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박해, 빈곤 등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낯선 땅에서 정체성을 지키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컬렉션 속 망명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난민들의 고통과 희망에 공감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1918∼1945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망명자 정기간행물 컬렉션은 역사적 자료임과 동시에 망명자들의 고통과 저항, 그리고 희망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며 현재와 미래 세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컬렉션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산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연대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