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와 봄의 틈에서
습지와 봄의 틈에서
  • 최지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5.02.05 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육현장

지난 1월, 한라산 1100고지 습지를 찾았다. 가을에는 한라물부추가 보랏빛으로 흔들리고, 습지의 작은 연못마다 반짝이는 수면을 간직한 곳이었지만 겨울의 1100고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눈이 쌓여 습지를 덮고 있었고 얼어붙은 물 위로 바람이 지나가며 차가운 기운을 더했다. 그런데 까마귀(아마도 큰부리까마귀였을 것이다)가 얼지 않은 물가에서 목욕을 하고 부리로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얼어붙은 듯 보였던 습지 속에서도 생명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 안의 생명력은 변함이 없었다.

지난 2일은 세계 습지의 날이었다. 1971년 이란 람사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람사르 협약이 체결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습지는 생물다양성의 보고이자 물을 저장하고 정화하며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는 중요한 생태계다. 하지만 도시 개발과 환경 변화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작은 습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공간의 변화가 아니라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습지는 단순한 물웅덩이가 아니다. 수많은 생명이 기대어 사는 집이자 자연의 거대한 정수기와도 같다. 우리나라에도 보호할 가치가 있는 습지가 많다. 우포늪은 국내 최대의 내륙 습지로 희귀한 조류와 다양한 생물이 서식한다. 순천만 갯벌은 흑두루미를 비롯한 철새의 쉼터이며 한강 하구 장항습지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독특한 생태계를 간직하고 있다. 습지는 기후 조절 역할도 한다. 여름철에는 기온을 낮추고 겨울에는 온도를 완충하며 대기의 수분을 조절한다. 습지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생태계 보호를 넘어 인류가 지속 가능하게 살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습지가 사라지면서 그 영향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미시시피강 하구의 습지가 줄어들며 허리케인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갠지스강 삼각주의 맹그로브 습지가 파괴되면서 해수면 상승에 더욱 취약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간척 사업으로 많은 갯벌과 습지가 줄어들며 해양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다.

습지는 자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삶에서도 습지와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땀 흘려 노력했지만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때 우리는 마치 습지에 발이 빠진 듯 멈춰 서게 된다. 기쁨과 성취만으로 이뤄진 삶은 없다. 때로는 아픈 기억과 슬픔 속에서 회복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눈물과 땀은 우리 안의 감정을 정화하고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가 슬픔을 통해 성장하고 기쁨을 크게 느끼는 것처럼 습지도 자연 속에서 균형을 만들어낸다.

학교에서도 그런 습지 같은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쉼 없이 달려가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 숨이 막힐 것이다.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친구들과 의미 없이 웃을 수 있는 공간, 교과서에서 벗어나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그것이다. 예술과 음악, 자유로운 토론이 있는 시간이 학생들에게 정신적 습지가 되어줄 수 있다. 마음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교실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의 장이 될 것이다.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학생들은 더 깊고 단단하게 성장한다.

입춘이 지나면서 꽃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 제주에 다녀온 분이 성산일출봉 부근에서 유채꽃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유채꽃이 활짝 피어 샛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은 차갑지만 분명 봄은 오고 있다. 

곧 새 학기가 시작되고 겨우내 움츠렸던 모든 것이 깨어날 것이다. 남쪽에서부터 올라오는 꽃 소식은 우리의 마음도 가볍게 만들어 준다. 노란 꽃들 사이로 따뜻한 볕이 퍼지는 모습을 떠올리면 곧 찾아올 봄날이 더욱 기다려진다.

우리 삶에서 습지 같은 시간과 사건을 피하려 하지 말자. 때로는 잠잠히 그 속에 머물며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급하게 빠져나오려 하기보다는 그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며 다시 일어설 힘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봄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 우리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곧 향기롭고 화사한 꽃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금은 회복의 시간, 습지의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이 모든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는 더 단단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