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가 많이 들어있는 신문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여 늘 곁에 두고 보는 날이 많았다.
신문기사와 광고까지 모두 읽으면 서너시간이 꿈같이 흘러갔고 그 내용을 종이에 쓰노라면 세상공부가 저절로 되었다.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온 날들이 엊그제같은 시절 신문은 곧 나의 친구였고 길잡이였다.
봄이 무르익어가는 오월에 신문사 제작부서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가 보았다. 처음 만나는 직원들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만 드리고 돌아왔다.
그 이튿날도, 사흘째 되는 날에도 똑같이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부장되시는 분이 부르더니 누구냐면서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하루도 빼지 않고 인사드리는 날이 두달여 되어가던 날 한 직원이 “이제 오지 말라” 고 말했다.
신문사에 취직이 되었으면 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지 십여일이 지난 어느날 신문사 직원 한 사람이 인쇄소에 와 “정인영, 왜 신문사에 안와? 빨리 가봐” 하였다.
다음날 아침 신문사에 갔더니 공장장이 신문 대여섯가지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거의 한자로 된 기사제목을 읽어보라고 했다. 평소 한자를 많이 익힌 때문인지 모르는 글자없이 읽고 나자 “내일부터 출근하라” 고 말했다.
할 일은 취재와 편집에 이어 활자가 채집되고 구성된 다음 단계인 틀리고 빠진 글자를 바로잡는 작업이었다. 교열부서에서 표시해준대로 고치는 일이어서 어렵거나 힘이 들지는 않았으나 한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새로운 직장 신문사에서 하는 업무가 익숙해지면서 근무하는 보람을 한참 느끼던 어느날이었다. 신문 1면 기자석 기사중 ‘박대통령’ 을 ‘박대령통’ 으로 바뀌어 들어가게 하여 편집국에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평소 아무리 잘 했다고 해도 한 순간의 잘못으로 인한 대가는 컸다. 1호봉 감봉에 누군가에게 감시받는 것 같은 불안속에 떠는 날이 이어졌다.
세월이 가면서 불안은 사라져가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일할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왜 그런 잘못을 했는지 생각했다. 그날 틀린 글자를 바로잡으면서 옆줄의 다른 글자를 건드려 아래 위 순서가 어긋나게 된 원인이 있었다.
좋은 일도 많았다.
신문발행면수가 4면이어서 오랜 시간 작업하는 일이 없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하여 2시간여 일하고, 한나절이 지나면 퇴근하여 집에 가거나 어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져갔고,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가운데 모든 면에서 조심스러웠다. 또래 아이들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고, 늘 어른들 속에서 성실과 노력의 인성을 키워가는 것이 상식화 되었다.
하는 일이 세련되어지면서 다양한 뉴스보도에 대한 중요성에 비추어 책임감은 더해졌다고 해도, 그에 대한 흥미 또한 즐거웠다.
하루중의 내 시간이 많아 이곳 저곳으로 걸어다니는 또 하나의 재미로 도시의 삶에 대한 관심과 지식의 또다른 기쁨도 컸다.
신문사창간 기념일때에 모범사원상을 받았다. 별로 잘 한 일도 없는데 상이라니 했다.
신문사가 부서는 몇개 안되면서 직원은 많아 승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어느날 차장으로 임명되었다는 발표에 한동안 어리둥절하는 영광도 누렸다.
신문사 근무 10여년이 훨씬 지나면서 더욱 발전된 자세로 열심히 일하면 평생직장으로써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시골에서 우물안 개구리로 살았던 지난날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히 잊혀져갔고, 이대로 밝은 날들이 이어질 것으로 믿었다. 가진 것이라곤 두려움밖에 없었던 촌뜨기 소년에서 이만큼 성장한 것만도 과분하다고 여겼다.
비바람부는 추운 길을 걷다가 따뜻한 온기에 몸을 녹이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듯 즐거운 미소를 짓는 날이 많아졌고, 혼자 있을 때는 콧노래를 부르며 짐짓 행복한척 하기도 했다.
신문사에 첫출근하던 날, 글자가 틀려 극심한 고통으로 힘들었던 날, 승진의 기쁨을 누렸던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충청일보.
내 인생의 젊은 날을 장식한 그 신문사는 훗날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生의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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