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흥분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한강이 노벨상을 받았대. 너무 대단하지 않아? 그래? 우리 집에 한강의 작품이 있었던가. 나도 한강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거 같기는 하다. 프랑스에서 뛰어난 문인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해본 것 같다. 한번 읽어봐야겠네. 이 여사가 주문한 책이 와 `채식주의자'를 먼저 읽었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의 3부로 구성된 장편 연작소설이다.
철학을 40년 공부한 나도 쉽게 이해가 쉽지 않다. 이 소설에서 처음 느낀 건 일상의 평온함을 찢고 올라오는 균열(龜裂)이었다. 잔혹한 꿈이 한 사람(정혜)의 삶에 균열을 일으켰고, 부부, 부모와의 사이를 갈라놓고, 언니 부부를 헤어지게 만들고, 마지막으로 언니와 동생을 긴장관계로 몰아가 정상적인 가정이 풍비박산되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런 관계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는 일상인에게는 당연히 불편한 소설이다.
이 균열은 잔인하고 끔찍한 정혜의 꿈으로부터 비롯된다. 낭자한 유혈, 시뻘건 고기덩어리, 덜렁거리는 안구, 충혈된 눈, 피 묻은 날카로운 칼 등등. 꿈은 지극히 평범한 정혜의 삶에 일어난 균열이다. 이 균열은 정혜의 일상적 삶을 바꿔 고기를 끊는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삶은 남편과 부모의 지극히 세속적이며 일상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도전이다. 이에 이들은 함께 정혜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 하고 이에 대해 정혜는 자살 시도로 저항한다.
정혜는 살이 찢기고 피를 철철 흘리는 잔혹하고 끔찍한 꿈을 꾼다. 이는 정혜가 인간 삶에 내재해 있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걸 알려준다. 이 꿈은 정혜의 삶에 내재적 균열을 일으키고 이 균열이 채식주의로 표출된다. 일상인으로 살아가는 남편과 부모, 직장 상사 부부는 정혜의 내재적 균열을 이해하지 않는다. 삶이 뿌리내리고 있는 폭력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니 그에 대한 감수성이 둔화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고기를 끊는 모습, 곧 채식주의, 그리고 그에 대한 거부감만 문제가 된다.
`채식주의자' 3부작은 육식이 폭력적이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평화로운 삶의 방식 유지로 끝나지 않는다. 채식주의는 고기를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사이의 폭력 관계에서 먹히는 자의 편에 선다고 할 수 있지만 정혜의 꿈에 드러난 균열은 당하는 자와 가하는 자의 관계가 정해져 있지 않다. 곧 누군가가 죽었는데 내가 죽었는지, 다른 사람이 죽었는지, 내가 죽였는지, 다른 사람이 죽였는지를 분간할 수 없다. 나의 삶은 평화롭고 타인의 삶은 폭력적이라는 편가르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폭력적 삶의 방식에서 정혜도 자유롭지 않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질해도 내 삶의 근저에는 내재적 폭력성이 자리 잡고 있다. 칼에 손을 베어 피가 흐를 때 그걸 손에 넣고 빨면 느껴지는 들큼한 맛이 나를 진정시킨다. 내가 아무리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 폭력을 혐오하더라도 나는 피맛을 즐길 줄 알며 나의 몸은 이미 거기에 물들어 있다. 여기까지 오면 정혜의 삶에 일어난 균열은 삶의 근원적 모순으로 진화한다.
인간은 먹히기 싫지만 먹고 싶어 하며, 먹지 않아야 하지만 먹어야 편안하다. 이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는 근원적 모순이다. 이와 같은 근원적 모순은 `채식주의자' 1부에서 채식주의자를 자처하는 정혜가 토플리스 차림으로 살아있는 작은 새를 잡아뜯어 먹은 마지막 장면으로 현실화된다.
삶의 근원적 모순을 알아차리면 일상인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정혜는 비정상 판정을 받아 일상인의 삶에서 격리되어 정신병동에 감금된다. 이후 `몽고반점'에서는 오히려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정상적 일상인들(남편, 부모)이 스토리에서 삭제(delete)된다.
다음은 II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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