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피는 꽃
늦게 피는 꽃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4.11.1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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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분꽃의 줄기가 계절을 맞서기에 연약해 보이거나 염려스럽지 않다. 뜨겁게 견뎌온 여름의 시간을 말해주는 걸까. 한낮에는 꽃잎을 앙다물고 있다가 해가 지면 환하게 고개를 들고 일제히 작은 나팔을 부는 모습까지 볼만하다. 향기마저 새색시처럼 고요하면서 정갈하게 퍼져가고 있다. 지나치던 전날과 달리 이런 분꽃의 속성을 마주하면서 순간 나름대로 늦게 피는 꽃이라 부른다.

한 시절 젊은 날에는 여유로움을 몰랐다. 경제적이나 정신적으로 한가할 틈이 없었다.

아쉽게 여기는 것은 스스로가 꽃의 인생이었건만 그 가치를 느끼지도 못했고 만족해하지도 않았다. 언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놀랍기만 하다. 현실에 눈을 뜨고 보니 아직도 숙명처럼 피워내야 할, 한 시절 지난 꽃과도 다름없는 내가 그 자리를 지키며 서 있었다.

내 삶의 반경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나서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떠들썩한 소리 들이 모두 향기였다. 이제야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분주하게 살아왔던 날들을 돌아보며 해 질 무렵에 한껏 피어나는 분꽃과도 같은 생이라며 나를 칭찬하고 싶다. 남들보다 더디고 부족한들 멈추지 않는 경주 속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라며 미소 짓는다.

뿌리내리고서 생명을 이어가는 식물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부모 그늘에서 벗어나 자립하고 또 하나의 가정이라는 둥지를 지니기까지 편평한 길만은 허락되지 않는다. 크건 작건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해지는 진리를 발견한다. 살아간다는 자체가 꽃피우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며 한 조각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우선 자신과의 화합이 중요할뿐더러 갈등과 분쟁에 휘몰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까지 알았다.

누구에게나 꽃피우는 역할은 주어졌으리라. 생각하기에 따라서 자신의 처지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리라. 하지만 지금 살아 있다는 것만큼 고귀한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순간을 마주한다는 사실에 또 다른 의욕이 생겨난다. 아직은 무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한낮의 기온을 피해 피어나는 저 분꽃이 계절에 비추어서는 분명 늦은 꽃이다. 그러나 작은 꽃의 형상에서 제 몫만큼 피워내는 힘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져 지고 있다. 이해의 폭마저 늘고 있는 것 같다. 나이만큼 급하지 않은 따뜻한 감정의 보자기를 지니고 싶어서일까. 언제 어디서든 풀어서 나눌 수 있는 여유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찬 기운으로 기우는 날 가운데서도 저리 밝게 꽃피우는 분꽃을 보며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다시 배운다.

대부분 꽃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 편이다. 나 역시 꽃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해 고개 드는 버릇이 잦아졌다. 살아온 길에 대한 후회라기보다 남은 시간을 갈무리하려는 마음가짐이다. 한 걸음 뒤로하며 또 다른 나와 마주 선다. 그동안 드러내지 못했던 고뇌의 꼬투리들이 꽃의 향기 속으로 스미어서 작아져 가는 듯하다. 저녁의 기온에 묻혀 이슬처럼 사라지고 있다.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하얀 분꽃이 나에게 맑은 영혼의 길잡이가 되겠노라 속삭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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