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가을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언어문화전공교수
  • 승인 2024.10.0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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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흔히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고 말한다. 계절의 변화에 대한 느낌의 차이는 비단 남녀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성별 또는 나이에 따라 그리고 각자의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인식과 느낌은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 나이가 들수록, 처한 상황이 어렵거나 외로울수록 사람들은 가을을 더 타는 듯하다.

조선(朝鮮)의 시인 최기남(崔奇男)도 인생 말년에 혼자 떨어져 살면서 가을을 몹시 탄 듯하다.





가을날(秋日)



浮世日多事(부세일다사) 뜬 세상에 날마다 일들 많은데



流光節又유광절우란) 흐르는 빛에 계절 또한 쇠퇴하네



葉稀郊色淺(엽희교색천) 잎은 거의 지고 들판 빛은 옅어지는데



天聲寒(천활안성한) 하늘은 넓어 기러기 소리 차갑구나



瘦骨常纏病(수골상전병) 야윈 뼈에 병이 항상 얽히니



秋懷轉少歡(추회전호환) 가을 타는 탓에 점차 기쁨이 적어지네



獨扶藜杖立(독부려장립) 홀로 명아주 지팡이 붙들고 서니



殘照下端(잔조하첨단) 남은 노을이 처마 끝을 비추네





시인의 가을 타기는 무상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고 실체가 없는 물에 떠 있는 부유물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사상누각 같은 온갖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계절 또한 영원하지 못하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은 세월 앞에서 계절은 곧 퇴색해지고 만다.

이런 바탕 하에서 시인의 관점은 가을의 사물들로 옮겨 간다. 잎이 거의 다 떨어진 나무와 녹색빛이 완연히 옅어진 마을 밖 들판, 여기에 넓어진 하늘과 차갑게 들리는 기러기 소리가 시인에게 포착된 가을의 조각들이다. 그런 뒤에 시인은 자신의 가을 모습을 자연스레 반추한다. 야윈 뼈에 온갖 병들이 덕지덕지 얽혀 있고, 가을 타는 마음에는 시름이 솟아나 점차 기쁨은 사라지고 만다.

가을의 사물과 자신의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시인은 늙은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집 밖으로 나선다. 지평선 밑으로 거의 들어가고 잔영으로 겨우 남은 노을빛이 처마 끝으로 들어오는 광경은 가을 타는 시인의 심경을 대변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 처경에 빠질수록, 외로울수록 사람은 가을을 더 심하게 탄다. 가을 타는 것은 일시적으로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겠지만, 긴 관점으로 보면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상함에 대한 자각은 가을을 탈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인데, 이를 통해 부질없는 집착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가을은 몇 번이고 타 볼만하지 않을까?

/서원대학교 중국언어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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