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읽는 문중 그뿌리를 찾아서
청주에서 국도를 타고 신탄진으로 가다 보면 경계선에 부근에서 왼쪽으로 현도초등학교가 나온다. 국도 옆에 있어 높고 긴 방음벽이 설치된 학교는 밖에서 보면 삭막하지만 학교 안은 아담하고 정겹다.
시골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논과 밭을 제외하면 여느 초등학교와 별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학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설계된 학교건물 너머로 야트막한 언덕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옛 비와 누각이 눈에 띈다.
다름 아닌 보성 오씨 문중의 효자를 기리는 비석과 효자정이다. 그 뒤편으로는 문중의 제실인 영모제가 세워져 있으며, 주변 묘소의 비각 대부분 보성 오씨 문중의 것이다.
이처럼 학교 주변을 포함한 현도면 곳곳에는 지선정과 강고사 등 보성 오씨 관련 옛문화유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500년 전 보성 오씨 문중이 현도로 이거 하며 달계리, 매봉리, 양지리, 중척리 등 현도면 일대와 낭성면에서 집성촌을 이뤘기 때문이다.
현도면을 두고 보성 오씨의 텃밭이라고 할 만큼 거대한 집성촌을 이룬 이들은 전남 보성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오씨의 원시조는 신라 지증왕 때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건너 온 오첨으로,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오웅을 함양에 남겨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이후 오웅의 12대손 오광우가 중국으로 돌라가고, 그의 손자 오연총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와 정착하며 중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오연총의 6대손인 오수전이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해주오씨, 둘째 아들은 동복 오씨, 막내 아들 오현필이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오현필은 고려 고종 때 거란군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보성군에 봉해지며, 그의 후손이 보성을 본관으로 삼으며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된다.
이후 고려말 대장군 오몽을이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에 오르며 빛을 발하기 시작해, 오현필의 8세손인 오점이 조선시대 예조판서를 지내며 가문을 일으킨다.
보성 오씨 문중이 청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약 1500년경 오숙동이 현도면 달계리로 옮겨오면서부터다.
오숙동의 이거로 이 지역은 오랫동안 효자와 학자를 배출하며 가문의 번성을 가져온다. 오경세 청원문화원장은 "풍수지리학자들의 답사지일 만큼 현도면에는 명당이 많다"고 말하고 "요직에 앉은 오씨는 대부분이 현도 출신이다."고 자부했다.
오 원장의 말을 입증하듯 현도면은 오박사 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유난히 박사출신의 후손들을 배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중의 내력은 오범수씨가 지난 1980년 충청대학을 설립하며 사학의 명문가로 가풍을 잇고 있다.
◆ 인물 & 인물
학계·정계 인물 다수 포진
거란 침입 격퇴한 오현필 필두 현대까지 걸출한 인물들 배출
거란군의 침입을 물리치며 공신이 된 오현필을 필두로 보성 오씨 문중은 고려말과 조선시대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다.
특히 조선의 개국공신인 오몽을이 이조판서를 지낸뒤, 그의 후광으로 문중 후손들은 벼슬길을 보장 받는다.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오자경은 평안도 절도사를 지냈고, 오점은 예조판서에 오르며 가문의 개화기로 삼는다.
고원군수를 지낸 오대남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에서 거란군에 항거하다 순절하는 충정을 보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오천을과 이조판서를 지낸 오연찰, 한성 판윤에 오른 오집, 형조판서에 오성 등은 가문을 더욱 빛낸 인물이다.
청주출신의 인물을 살펴보면 유난히 효자가 많다.
아비의 병시중하는 아들의 효심에 하늘도 감탄했다고 전해지는 오경례와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지자 병의 차도를 진단하기 위해 어머니의 변을 먹었다는 오상윤, 가난해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어버이께 드리려 갖고 왔다는 오상진, 삼대가 효행이 특이하다 하여 예조가 정려를 내린 오상건, 오진택, 오정기 등은 문중의 대표적 효자다.
이외에 문신으로 진사시를 거쳐 1511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오윤, 지방관직으로 나아가 승지에 오른 오숙, 광해군 때 문신으로 삼년동안 시묘살이하며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오행건, 문사로 이름을 날린 오행간, 영조 때 늦은 나이로 문과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오저 등은 조선의 문신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무신으로는 몽고군을 격퇴한 오대남이 이름을 날렸다면, 낭성면 출신인 오세한은 무과 출신으로 병마절도를 지냈는데,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오교선 등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현대인물을 살펴보면 문신 출신의 선조를 잇듯 학계와 정계에 많은 인물이 포진되어 있다.
현도면에서 오건세, 오장균, 오원진, 오노균, 오상진 등 5명의 박사를 배출한데서 기인한 오박사 축제는 보성 오씨 문중을 확실히 드러낸다 하겠다.
이외에도 오범수씨가 충청대학을 설립하며 지역 사학으로 자리잡았고, 오선균 충청대학장, 오경호 충청대이사장, 오덕균 충남대교수, 오희필 대전대 교수, 오갑준 전 교육대교수 등 다수가 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계로는 오장세 충북도의원, 오제세 국회의원, 오효진 전 청원군수, 오병하 전 청주시장, 오성균 변호사와 오해진 판사, 오동윤 변호사, 오범식 전 재무차관, 오영자 대전시 복지국장 등 문중 인물이 곳곳에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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