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발호(跳梁跋扈).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힌 문구이다. <교수신문>는 2001년부터 매년 전국 대학교수 대상 설문조사를 해, 그 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뽑아 발표하고 있다. 올해 꼽힌 사자성어가 바로 도량발호, ‘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는 행동이 만연하다.’라는 뜻이다. 이 밖에도 후안무치(厚顔無恥), 석서위려(碩鼠危旅),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등의 사자성어가 꼽혔는데, 모두 2024년 한국 정치의 단면을 상징하는 문구들이다.
12월 3일 계엄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에 흥겨웠던 연말의 풍경도, 일상적으로 건네는 연말인사도 모두 낯선 일이 되어 버렸다. “행복하고 편안한 연말 되세요”라는 의례적인 인사조차 건네기 어려워진 현 시국에 한숨을 내쉬다가도, 어떻게든 이 난국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는 국민들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 그런 시절이다.
2024년은 문화유산 분야에서도 변곡점이 되는 한해였다. 지난 5월 국가유산기본법이 출범하면서, 지금까지 썼던 “문화재(文化財)”란 용어 대신 “국가유산(國家遺産)”이 공식 명칭이 되었고, 유산의 범위도 자연유산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면서, 문화·무형·자연 3가지 유형의 유산으로 확장되었다. 또한 국민이 국가유산의 주체로서 부각되어, 모든 국민이 국가유산을 알고 찾고 가꾸며, 차별 없이 자유롭게 향유할 권리를 갖는 것이 법으로 천명되었다.
충청북도로 범위를 좁혀본다면 도에 문화유산과가 신설되는 성과가 있었다. 대한민국 광역지자체 17곳 중 충청북도는 유일하게 국가유산 전담과가 없는 지역이었고, 행정적 뒷받침이 부족하다 보니 당연히 타 지역에 비해 유산 관리나 활용이 저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문화유산과가 신설되면서, 비로소 유산 보존·활용의 토대를 마련되었고, 충북 유산 발전 및 활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큰 변화와 성과를 이룬 한해였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럽고, 주가와 환율이 천정부지로 오르내리고, 세계 여기저기서 전쟁과 마약과 같은 악재가 발생하고, AI, 메타버스와 같은 신기술이 하루가 멀다하고 발표되는 이 시점에, 과연 과거의 산물인 유산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왜 우리는 이 어려운 시기에도 유산을 돌아보고 보존해야 하는 걸까? 솔직히 이 분야를 공부하고 오랫동안 몸담아 온 필자조차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물론 의례적인 답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문화유산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자, 우리 삶의 뿌리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많은 문제들 앞에서 이 형이상학적 논리만으로는 무언가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부분이 필자에겐 언제나 가장 큰 의문이었고, 숙제였다.
그런데 올해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강연 속에서 그 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작가가 던진 이 물음에 2024년 우리는 답을 얻었고, 그 답은 필자가 가진 질문에도 하나의 큰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물론 필자의 질문에 명확한 답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많은 질문과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어떻게 과거의 산물인 유산이 현재의 우리를 도울 수 있는지, 그저 향유의 대상을 넘어 현재를 구하는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끊임없이 물어보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음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사람으로서 희망을 갖고 2025년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발란반정(撥亂反正), 난리를 평정하고 질서 있는 세상을 회복한다는 뜻의 사자성어이다. 부디 2025년의 사자성어는 우리 국민의 특기, 국난 극복의 의미를 담은 문구가 채택되길 바라며 올해의 칼럼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