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팬심
남편의 팬심
  • 변지아 제천여고 교사
  • 승인 2024.10.23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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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칼럼에 남편의 음악 세계에 대한 짧은 일화를 언급했었다. 오늘은 그 2편을 써보려고 한다.

남편은 나를 만나고 음악과 좀 더 친밀해졌다. 주말에는 교직원 연수로 `메밀꽃 필 무렵'을 보고 와서는 자신이 뮤지컬 감상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유를 알겠다고 말하며 `연기력'을 뮤지컬의 주요 요소로 지적했다. 극음악을 감상할 때 가창력은 우수해도 연기력이 부족하면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뮤지컬을 평가하는 기준과 본인의 취향을 언급한 것이다. 작년 여름에는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 연주도 거뜬하게 감상하고 자신은 이런 오케스트라 공연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두 시간 넘게 극음악을 감상하거나 30분 이상 이어지는 후기 낭만적 음향도 이해할 수 있는 청중으로 성장했다.

그의 성장은 지휘자 정명훈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몇 해 전 남편이 얻게 된 좋은 기회로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운명 교향곡 연주를 관람하게 되었다. 둘이 연주회 관람을 위해 상경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일 집을 나서며 유명하다고 하던데 `정명훈 얼마나 잘하나 보겠다'면서 음악 교사 아내를 위해 선심 쓰듯 연주장으로 데려갔다. 연주는 물론 아주 좋았다. 감상 후기가 듣고 싶어 “그래. 정명훈 잘하더냐?”라고 물으니 그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정명훈이라니! 정명훈 선생님이라고 해야지!”라고 나를 나무랐다. 그날 제천으로 내려오면서 운명의 동기라고 부르는 세 음을 시작할 때의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 동작을 흉내 내며 연주의 감흥을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몇 주 전 한글날 세종시 예술의전당에서 지휘자 정명훈과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와의 연주회가 있었다.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는데 “선생님 연주하시는데 당연히 가야지”라고 하며 연주 프로그램을 예습하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과 프로코피예프 발레 모음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스트리밍으로 열심히 들었다.

드디어 연주회 당일. 고희(古稀)를 넘긴 정명훈 선생님의 피아노 협주곡은 희로애락 몇 번을 넘긴 인생의 끝자락에서 나오는 평온함이 있었다. 즐거움도 슬픔도 큰 동요 없이. 덤덤한 즐거움과 무던한 슬픔이라고 할까? 2부는 지휘자 정명훈으로 돌아왔다.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 함께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무대 위 무용수가 함께하는 듯했다. 장면이 그려지는 연주로 전율과 놀라움을 주었다.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는 오페라 연주단이라는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냈고 거장의 손길로 표현력은 증폭됐다. 연주장을 나서며 남편은 앙코르로 들려준 음악의 제목을 물어보았다. 레온카발로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과 로시니의 빌헬름텔 서곡이라고 알려주니 검색해서 스트리밍 목록에 바로 추가했다.

차들이 빠져나가는데 한참 걸릴 것 같아 주변을 산책하며 이야기했다. “오늘 연주 어땠어?” 남편은 이렇게 답했다. “정명훈 선생님 입으신 옷 봤어? 그게 바로 거장의 위대함이지.”

그날 정명훈 선생님은 드레이프성이 좋은 연 네이비 니트 셔츠와 풍덩한 실크 바지를 도인처럼 입고 나오셨다. 일흔을 넘긴 노인의 뒤태에 지휘로 단련된 잔근육이 도드라져 보였다. 남편은 그 모습에 또 반했나 보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나도 선생님 같은 옷 사줘.” 거의 굿즈랑 연예인 아이템 모으는 사생팬이 따로 없다.

젊은 신진 지휘자라면 그런 복장은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정명훈 선생님이시니 리허설 같은 복장으로 편이 연주하셔도 오직 음악으로만 평가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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