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우리 집
즐거운 우리 집
  • 김태옥 충북대 러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24.09.2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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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추석은 10월 첫날이었다. 당시 나는 바이칼 호수가 지척인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1581년, 황제 이반4세(1530~1584)의 명에 따라 1,600여명에 달하는 코사크 기병대와 자원병이 예르막 티모페예비치(1532~1585)의 깃발 아래 시베리아 원정, 동방 원정에 나섰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1661년, 이르쿠츠크가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이후 이 도시는 인구 60만명의 문화·예술의 도시, 혁명가의 도시, `동방의 파리'로 성장했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통과하는 동시베리아 철도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도 러시아 전공자들에게조차 낯설고 생소한 도시였다. 그 외진 도시에서도 한국인 사업가와 선교사가 있었고 나와 같은 학생이 있었다. 그 해 추석을 맞아 한국인 사업가의 집에서 조촐한 명절 모임이 마련됐다. 추석 전날인 9월30일. 타이가 숲을 지나야 나오는 초대한 이의 집으로 가는 길에 함박눈을 만났다. 모두가 추석이라는 단어를 까맣게 잊은 채 너도나도 설 이야기를 꺼냈다. 낯선 이국 땅, 9월 타이가의 가을 숲 사이에서 맞이한 눈이라니! 20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그때 그 황금빛 자작나무 숲 사이로 내리던 하얀 눈과 그 위를 밟으며 함께 걸었던 이들의 숨결이 지금도 선명하다. 들판은 눈발로 가득했지만 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그 집 마당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먹었던 음식은 참으로 따뜻하고 풍성했다.

이맘때쯤이면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하면서`날씨가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가을이 성큼 온 듯합니다.'라는 인사를 건넸는데 추석이 지나고서야 이런 안부를 주변에 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길고 길었던 2024년 여름 그 무더위는 20여년 전의 그날처럼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문득 이 무더웠던 여름과 행복한 추석 연휴를 `그들도' 즐겁게 보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현재 청주를 포함한 충북에는 등록 및 미등록 러시아어권 이주민이 약 1만 2000여명 거주하고 있다. 2014년 크롬반도가 러시아로 편입된 직후 러시아를 대상으로 시작된 경제제재는 2022년 2월24일 발발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더욱 강화됐고 그 피해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많은 국가의 시민들에게로 고스란히 향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현재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대한민국, 특히 주택과 교육, 노동환경이 적합한 충북을 선택하고 있다. 모국인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 자신들이 평생 거주하던 집과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부부와 자녀, 혹은 가족 전체가 낯선 한국 땅으로의 이주를 선택하고 있다. 문만 열면 러시아어와 우즈벡어, 카자흐어가 들리고 골목만 들어서도 인사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고, 함께 뛰놀고, 벤치에 앉아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그들의 모국은 저만치 먼 곳에 남겨져 있다. 그들의 `즐거운 우리 집'은 주인 없이 홀로 우두커니 남겨져 있고, 비좁은 원룸과 낯선 골목길이, 이름 모를 한국어 간판이 그들의 새 삶의 터전을 채워가고 있다. 일손이 필요한 공장, 인적 없는 뜨거운 밭 한가운데서 우리의 잠자리와 먹거리를 위해 수고하는 그들에게 어떤 이는 30도가 넘는 날씨에 씻을 곳 하나 없고 숨쉬기조차 버거운 양철 컨테이너를 참 적합한 `너희의 집'이라고 제공한다.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장편소설 `루딘'(1856)의 마지막 장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길고 긴 (러시아의) 가을밤이 찾아들었다. 이러한 밤 지붕 밑에 편안히 들어앉을 수 있는 사람, 따뜻한 자기 보금자리를 가진 이는 행복하다…신이시여, 집 없이 헤매는 방랑자들에게 도움을 주소서!'

반드시 저출산, 고령화, 지방소멸, 국가의 지속 가능성 위기 때문이 아니라 해도 그들은 더 이상 맞은편에 선 `너희'가 아니다. 함께 품고 가야 할 우리들이다. 다음 설 명절에는 내 주변에 사는 이주민의 손을 한 번 잡아보자. 우리 집에서 따뜻한 떡국 한 그릇을 대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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