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휴식
강제 휴식
  • 전현주 수필가
  • 승인 2024.07.24 17: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전현주 수필가
전현주 수필가

 

하룻밤 사이에 사정이 달라졌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다음 날 할 일을 머릿속으로 셈하고 있었는데 불과 몇 시간 후인 지금은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었을 뿐인데 도대체 내 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너무 아파 신음이 새어 나오고 정신이 아득하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찬찬히 되짚어 본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 상태에 역정이 난다. 병원에 다녀와도 별 차도가 없다. 아플 만큼 아파야 나을 작정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자신만만하던 인간이 이렇게나 무력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절실히 와 닿는다.

주말에 계획되어 있는 집안 행사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2주 후로 옮겼다. 몇몇 약속도 전화나 문자로 취소했다. 모두 어렵게 시간을 내어 맞춘 날이었는데 뜻밖의 변수가 생기고 보니 미안한 마음도 잠깐이었다. 앞으로 일주일의 일정이 모두 비었다. 이제 마음 놓고 아파도 될까. 사실 출산했을 때도 이렇게 쉬어본 적이 없다.

밤낮으로 잠이 쏟아져 비몽사몽이다. 예전에 어른들이 잠은 빚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도 모르는 빚이 이렇게나 많이 어디에 쌓여 있었단 말인가. 이유를 찾기도 전에 또다시 까무룩 잠에 빠져든다. 잠깐씩 정신이 들 때마다 할 일만 생각난다.

얼마 전 감자를 캔 자리에 새로 심은 애호박은 지금 곁순을 잘라주고 줄을 잡지 않으면 일이 힘들고 번거로워진다.

옥수수도 수일 내에 수확하여야 한다. 요 며칠 비가 와서 성장이 주춤하고 있지만 이러다가도 갑자기 해가 뜨거워지면 서둘러 출하해야 한다. 그런데 모처럼 쉬게 되었는데도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들만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다.

포기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 잊고 이참에 강제로라도 휴식을 취할 생각이다.

몸이 쑤시는 증세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비록 누워서라도 책을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꽤 전부터 머리맡에 두고도 손을 대지 못하던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펼쳐 든다.

누워서 읽으려니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쪽저쪽으로 몸을 뒤척이게 된다. 그러고 보니 박완서 작가도 이렇게 누워서 책을 읽곤 했었다는 말을 오래전에 들었던 것 같다. 갑자기 내가 무슨 큰일이라도 하는 듯 뿌듯한 마음이 든다.

열이 나 괴롭던 몸이 크리스마스 무렵 북유럽의 겨울 분위기에 빠져들며 잠시나마 아픔을 잊는다. 주인공 펄롱은 매일 반복해서 땔감 배달을 하면서도 우연히 목격한 수녀원에서의 불의를 대면하고 고뇌하기 시작한다. 결국 아이를 구출해 함께 집으로 걸어가며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한다. 앞으로 큰 대가를 치러야 함에도 당당하고 기쁜 그가 부럽다.

그동안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내가 나중에 나중에 하면서 미뤄두었던 일들은 대부분 내가 간절히 하고 싶었던 어쩌면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었다.

다시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감히 기대해도 될까. 감기는 강제 휴식을 통해 단지 나를 쉬게만 할 속셈은 아니었나 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