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진 바닷길을 걷듯이, 산 아래를 파서 만든 구덩이에 들어갔다. 50년간 군사시설로 묶여있던 방공호였다.
어렸을 때 소문으로만 들었던 비밀의 공간이었다.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던 시절과 함께 어느새 기억 속에서도 잊힌 장소였다.
그곳이 지난해 10월에 이름을 바꾸어 나타났다. 당산 생각의 벙커! 당산의 암반을 뚫고 콘크리트와 철골로 폭 4m, 높이 5.2m, 길이 200m의 터널 형태로 만들었던 구조물을 문화 예술을 위한 벙커로 개방한 것이었다.
잘된 탈바꿈이었다. 생각이 행동을 낳는 것이라고도 하니, 이곳에서 농익은 문화와 예술의 생각이 올곧은 방향성을 가지고 맛난 가치를 뿜어냈으면 좋겠다.
지난달에는 충북도립교향악단 멤버들이 현악 4중주로 4호실(휴식광장)에서 ‘찾아가는 연주회’를 열어 모차르트, 바흐, 엘가, 드보르작, 피아졸라, 디즈니 OST들을 나누었다. 손지연(바이올린), 서하미(바이올린), 김규식(비올라), 박성진(첼로)의 수고가 많았다.
엄마 손잡고 따라온 즐거운 아이들로부터 상념에 젖은 듯한 표정의 노인들까지 객석은 다층적이었고, 연주는 귀에 친숙한 선율로 편안했다.
벙커의 울림이 좋아서 마이크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의 분위기라기보다는 은밀한 동굴의 기도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벙커를 나오다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이 말한 파란색의 정의를 되새겼다. “파란색이란 무엇인가? 파란색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된 것이다. 파란색에는 차원이 없다. 다른 색들이 차지한 차원 그 너머의 색이다.”
당산 생각의 벙커를 통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되길 바랐다.
여러 가지 색에 물들어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당산 생각의 벙커처럼 변신의 물꼬를 트고 있는 장소를 찾아보는 것도 당신의 삶을 싹 틔우는 씨앗 한 톨이다.(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