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지 말고, 기억하세요
찍지 말고, 기억하세요
  • 양철기 심리학 박사 한솔초 교장
  • 승인 2024.11.05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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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발길 닿는 곳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 펼쳐지는, 11월 대한민국 산하(山河). 오대산 깊은 골짜기 산사(山寺)의 단풍은 보는 이의 넋을 홀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빠알간 단풍을 가로지르는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아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세상만사가 아름답게 보이는 황홀경에 빠진다. `정상경험(頂相經驗, Peak experience)'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 정상경험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A. Maslow)는 깊은 몰입과 황홀감을 수반하는, 개인의 인생에서 최고로 고양된 만족과 환희의 체험 순간을 정상경험이라 했다.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무아지경 (無我之境)으로 정신이 한곳에 온통 쏠려 자신을 잊는 경지를 말한다.

심리학 연구들에 따르면 정상경험을 많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는 차이가 있다. 즉,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상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삶의 만족감과 성취도가 높았으며, 정상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시나 음악, 철학 등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정상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신을 보다 건강한 양식으로 보고, 타인을 보는 견해와 타인과의 관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 가수 싸이의 흠뻑쇼

가수 싸이는 한 인터뷰에서 관객들의 모습에 대해 “공연을 하다 보면 관객들은 촬영을 하느라 사실 공연에 집중을 많이 못한다. 무대에서 객석을 보면 전체가 다 카메라다.”라고 말했다.

예전 대학 축제에서는 학생들이 호응하며 노래를 즐겼는데, 요즘에는 핸드폰으로 촬영하며 공연을 본다면서, 그래서 자신은 `흠뻑쇼'를 시작할 때 이렇게 외친다고 이야기했다.

“소리 지르고 싶으면 소리 지르고, 뛰고 싶으면 마음껏 뛰고, 오늘만큼은, 이 순간만큼은 실컷 즐기다 가세요. 기록하지 말고, 기억하세요.”

`기록하지 말고 기억하세요.'라는 외침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공연에 푹 빠져 정상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촬영하느라 놓쳐버리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인지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주의집중 용량은 한계가 있어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핸드폰 촬영에 주의를 할당하면 가수의 공연 자체에 집중할 주의력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기록은 기억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지금 경험이 잊힐까 두려워 오래 기억하기 위해 핸드폰에 그 경험의 기억을 담아두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위해 내 경험을 희생하는 것보다는, 내 즐거움의 감정을 온전히 마음속에 기록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 가슴에 기억 새기기

산사의 빠알간 단풍나무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오랫동안 바라보며 즐기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나무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 바쁜 방문객들로 그 나무는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진 찍는 일에 진심인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리기 위함인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SNS 지인들과 공유하고픈 아름다운(?) 마음은 높이 살 만하다. 다만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 정상 경험을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

11월의 풍경, 이 순간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 마음껏 느끼고 싶다. 그래도 아쉬우면 사진 한두 컷 수줍게 찍어 기록하면 되겠다.

캐나다 작가 루시 몽고메리가 지은 소설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의 한 구절처럼.

“나는 삶이 주는 기쁨과 슬픔, 그 모든 것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마음껏 느끼고 표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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