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무 의병장과 모유정 설화이야기
박춘무 의병장과 모유정 설화이야기
  • 김명철 전 제천교육장
  • 승인 2024.11.12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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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청주 에덴원에서 가까운 곳에 청주의 명물인 가로수길이 있고, 그 입구에 부모산성이 있다.

부모산성 아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청주성 수복을 이끈 의병장이자 문신이며, 세계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3대 의병장 가문인 박춘무 의병장의 유적이 있다.

박춘무 의병장은 조헌(1544~1592)과 함께 일본에 빼앗겼던 청주성을 1592년 8월 2일에 되찾는 전과를 이루었다.

이 승리는 임진왜란 초기 육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박춘무 선생의 의병부대는 청주성을 수복하기 위해서 7월 초 청주 복대동 일원에서 출정식을 하였는데 의병부대의 규모는 대략 100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조헌은 서문을 공격하고 박춘무는 남문을 공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청주성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조헌은 황간 영동 이남의 적과 싸우고, 박춘무는 금강 이북의 적과 싸우기로 하였다.

박춘무는 진천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들을 격퇴하고 진천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박춘무의병장은 청주성을 탈환할 때 “전진(戰陣)에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병사들에게 훈계를 하였으며, 부모산성에는 모유정(母乳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 모우정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박춘무의병장이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부모산) 마저 탈환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을 때 일이다.

번번이 박춘무 의병 부대에게 패배를 경험한 왜군은 군사로 아양산을 포위하고 식량 보급을 차단하여 의병을 압박하였다.

또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왜장은 포위를 굳게 해서 식량과 물의 공급을 철저히 막았다.

이에 화천당이 이끄는 의병은 굳게 단결하여 항전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식량과 물이 부족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보름을 넘기자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고, 화천당도 기진하여 산기슭 큰 소나무 밑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동안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 지팡이를 짚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화천당을 독려하여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화천당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화천당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군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위에 모여들었다.

화천당은 군사들에게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뽑게 했다. 소나무가 채 뽑히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많은 양의 물이 솟구쳐 나왔다.

수량이 많아 식수는 물론 말의 목욕까지 시킬 정도였다.

이에 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항전했고, 산중에 많은 수량의 수맥이 발견된 것을 알게 된 왜병은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왜병이 물러가자 화천당은 목타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물을 내린 것은 마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돌보고 음식을 주는 어버이의 은혜와 같다고 하여 제단을 모으고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때부터 아양산은 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한 화천당이 죽음 직전에 계시를 받아 판 우물을 모유정(母乳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번 가을에는 청주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부모산에 올라 어머니 젖과 같은 모유정 우물을 찾아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박춘무 의병장의 마음을 느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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