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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지 않아도 가랑잎은 / 한 잎, 두 잎, 떨어집니다. / 산과 들에는 / 단풍이 한창이어서 벌겋게 숯불처럼 피인 게 / 그래두는 덥지 않고 선선하기만 합니다.' 오장환 시인의 동시 `가을'이다.
산책로와 숲길을 가득 채울 깊은 가을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10월 첫 주 보은 회인에서 29회 오장환문학제가 열렸다. 매년 가을 이맘때가 되면 보은은 시인 오장환을 기리는 문학제와 대추축제 준비로 군 전체가 분주하다. 청주에서 보은으로 향하는 굽이굽이 피반령길, 그 곳을 지나 만나게 되는 정겨운 회인재래시장, 풍림정사를 뒤로하고 대청호로 길게 뻗어 회남초등학교와 회남대교로 이어지는 571번 국도를 품은 보은은 사계절 언제나 삶의 시름을 잊게 하고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주는 동화 같은 곳이다. 그곳 보은군 회인면 한가운데 2006년 10월 개관한 오장환문학관과 복원된 시인의 생가가 있다.
필자는 2013년 18회 오장환문학제부터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매년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오장환은 1918년 보은에서 태어나 1951년 6·25 전쟁 중에 사망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조국의 독립을 병상에서 맞이해야 했던 시인은 남북이 분단되어 가는 현실을 좌시하지 못하고 반대운동을 펼치다 테러를 당하고 이후 지병이었던 신장병 치료와 남에서의 암살 위협을 피해 1948년 북으로 향했다. 북에서 오장환은 소련적십자사의 공식 초청을 받아 1948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쯤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신장병 치료를 받는다. 이후 북한의 이념 노선에서 제외된 오장환은 사망 후 북쪽 문학사에서 영구히 잊히게 된다. 그렇게 시의 황제로 불리며 주목받았던 오장환은 월북 시인, 휴전선의 시인, 비애의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다.
20세기 한국의 천재시인 오장환은 20세기 러시아의 천재시인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예세닌의 사상과 시에 깊이 매료돼 있던 오장환은 그에 관한 에세이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그의 시를 번역해 `예세닌 시집'(1946)을 발간했다. `러시아의 농촌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예세닌은 미국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의 남편이었다. 러시아의 조용한 시골, 랴잔 출생인 예세닌은 태어난 자신의 고향을 사랑했고 러시아의 자연과 러시아 민족에 대해 강한 애정을 품었다.
`이 나라, 이 넓은 들판을 / 한번이라도 본 이는 / 어드린 백화나무 밑뿌리에라도 / 뜨거운 입술을 부비지 않고는 못 베기리라. / 얼어붙는 추위 속에 잎새 소리를 내며 / 러시아의 젊은 나무 나무들이 꽃을 내달고 / 발을 맞추어 춤추고 노래 부를 때 / 내가 어떻게 울지 않고 배기겠느냐.(오장환이 번역한 예세닌의 시 `작은 숲. 스텝, 그리고 먼 곳')
젊은 시인은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이 러시아를 진일보하게 해주는 수단이라 믿고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혁명은 그가 믿고 바라던 형태의 새 시대를 열어주지 않았고 그의 삶은 우울하고 고독했으며 결말은 비극적이었다. 1925년 12월 한겨울, 예세닌은 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에서`산다는 것 역시, 물론, 더 새삼스러울 것 없나니'로 끝나는 시 `안녕, 내 친구여, 안녕.'이라는 유작을 남기고 자살한다.
격동의 혁명기와 러시아 내전(1918~1921)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다 서른에 세상을 떠난 세르게이 예세닌. 그의 시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20세기 대한민국의 천재시인, 하지만 일제치하, 좌우이념대립, 한국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서른셋의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오장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질곡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젊은 두 영혼의 운명이 전해주는 아픔이 결코 적지않게 다가오는 가을 아침이다.
`나요. 오장환이요. 나의 곁을 스치는 것은, 그대가 아니요. 검은 먹구렁이요. 당신이요.'(오장환 `불길한 노래') 가을 보은의 대추에는 오장환이 사랑했던 고향의 애수가, 동시 속에 담겨져 있던 정겨운 보은의 자연이, 그가 열매 맺고자 하는 단단한 시대의 꿈이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