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보다 사윗감
여행보다 사윗감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4.04.24 17: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시드니에서 뉴질랜드 남섬으로 날아온 첫날이었다.

적당한 키와 까무잡잡한 얼굴, 발음이 정확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청년을 만났다.

남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예의 바르고 다정다감하고 인물도 그만하면 준수하다.

출발 지연으로 예정된 도착시간보다 늦은 오후에 이곳 공항에 내린 우리는 시내 관광에 나섰다.

크라이스트 처치는 공원과 공공정원, 휴양지들이 시 면적의 1/8을 차지하고 있는 뉴질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평원의 도시다.

2011년, 대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어 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은 곳이다. 아직도 철거하지 못한 무너진 건물이 당시의 참상을 말하고 있다.

새로 지은 건물들이 한결같이 층수가 낮아 한적한 동네처럼 편안하다는 내 말에 남섬의 짧은 역사와 지진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청년의 진지한 모습에 호감이 간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려면 보통 3~4시간이 소요된다. 목가적인 풍경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앞자리에 앉은 나는 바깥 풍경이 지루해질 즈음,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시드니에서 만난 가이드에게 실망감이 컸던 만큼 이곳에서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어 말을 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십여 년 전 시드니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며 여행을 한 나는 그곳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 간 일행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설명이 없어 불만이 컸었다.

청년에게 던진 질문은 생뚱맞았다. 여기에서 가이드라는 직업을 선택하려면 무척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가 무어냐 물었다.

홀로 타국에서 터를 잡은 지 7년째라고 한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그만두었다고 한다.

다수의 젊은이들이 단체보다는 개인적인 생활을 중요시하듯 청년도 회사에 매여 시간에 쫓기듯 살아야 하는 게 싫었다고 했다. 이곳에 여행 왔다 정착했다고 한다.

한인 식당에서 열심히 일해 4년 만에 영주권을 받고 가이드로 일 한지 3년 되었다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앞으로의 계획도, 꿈도 야무졌다. 요즘 보기 드문 희망 넘치는 성실한 청년이다. 은근히 탐이 났다.

결혼하지 않은 딸도 없으면서 헛욕심을 부린다.

일행 중 한 여인도 사람이 탐이 났는지 과년한 딸이 있으니 사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대답이 걸작이다.

가이드 생활 3년 동안 장모님이 백 명쯤 된다고 한다. 사위 하자 해 놓고 여행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다며 웃는다. 며칠간 함께 지내다 보니 내 식구로 들여도 손색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같았나 보다. 하지만,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되던가.

주변에는 30대를 지나 40살을 넘겨도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는 자식으로 고심하는 부모가 많다. 무엇보다 나이 든 딸이 있는 엄마는 참한 청년을 보고 욕심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휴게소에 잠시 정차하는 사이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는 여인이 멀리 떨어져 있는 가이드 눈치를 살피며 딸에게 전화해 넌지시 의향을 묻는 말소리가 들린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단칼에 거절하는 딸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다. 여행보다 사윗감이 급했던 여인은 씁쓸한 헛물만 켰다.

청년에겐 101번째 장모님이 생겼다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