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연가
장모님 연가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4.05.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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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장모님은 살아계신 유일한 부모님이십니다. 40년 전에 아버님이, 35년 전에 장인어른이, 25년 전에 어머님이 별세하여 장모님 덕에 천애고아를 면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장모님마저 곁을 떠나려해 몹시 우울하고 상심이 큽니다. 96세 고령인데다가 노환과 치매가 날로 위중해져서 입니다. 아내의 엄마이자 두 아들의 외할머니인 장모님을 잘 모시기는커녕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후회막급이고 불효막심이어서 가시방석입니다.

돌아보니 장모님은 제 삶의 오아시스이자 향수였고 기댈 언덕이었습니다. 사위 사랑은 장모란 말을 입증하듯 사위의 어리광과 부족함을 감싸주셨고, 아내에게 남편 내조 잘하라고 채근해 주셨던 장모님이셨습니다. 장모님의 위세가 등등한 세상이지만 예전엔 딸 잘 봐달라고 사돈과 사위에게 저자세를 취했던 가깝고도 먼 분이 장모님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쓴 제 졸시 `직무유기·2'가 떠올라 씁쓸하고 가슴이 시립니다.

`시어머니도 과부/ 친정 엄마도 과부/ 병든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며느리야/ 홀로 계신 친정 엄마 생각에/ 깊은 밤 베개 밑 적시는/ 딸아/ 친정 엄마는 12년째 빈집지기/ 시어머니는 16년째 한숨지기'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두고 일찍 귀천한 남편이 직무유기를 한 건지, 사랑하는 남편을 일찍 여윈 아내가 직무유기를 한 건지, 아니면 둘 다 직무유기를 한 건지를 허공에 묻는 시입니다. 동시에 우리 부부는 그리되지 말자는 희원을 담은 시이기도 했습니다. 각설하고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 생활거지였던 충주의 아파트에서 수년간 홀로 사시다가 거동이 불편하여 요양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리 산지 십 수 년이 되었으니 요양원을 일러 한 번 들어가면 죽어야 나오는 현대판 고래장이란 말이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장모님은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을 두었습니다. 넷째 딸과 결혼해 넷째사위가 된 저는 4번 타자라고 거들먹거렸지만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집에 모셔 와서 케어하고 싶었지만 실행하지 못한 용열한 사위였습니다. 보름 전에 딸들이 의기투합해 거사를 치렀습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하는 두물머리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방 세 개와 노래방기기가 설치된 널찍한 거실이 있는 펜션을 임대해 장모님과 1박2일 함께 지내는 이벤트였습니다. 사설 엠블런스를 임차해 장모님을 서울 B요양원에서 남양주 N펜션으로 모셔 와서 독일에 사는 첫째 딸 외에 네 딸과 사위 셋이 합세하여 장모님께 재롱을 떠는 추억 만들기 이별여행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후 노래방기계를 틀어놓고 여흥시간을 가졌는데 막내딸 외에는 잘 알아보지 못하던 장모님이 한창 때 즐겨 부르셨던 `동백아가씨'와 `소양강 처녀' 그리고 장인어른의 애창곡인 `나그네 설움'을 눌러드렸더니 가사를 보지 않고 1~2절을 모두 부르는 겁니다.

`수자 신랑'이라고 `넷째 사위 김 서방'이라고 해도 몰라보고 `선생님'하던 장모님의 그런 모습이 경이로웠고 애잔했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없고 과거만 있는 삶, 치매가 그런 거였습니다. 이튿날 헤어질 때 딸들은 서럽게 우는데 장모님은 그런 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차에 오르니 잘 가시라 손 흔드는 것조차 죄스러워 긴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문득 장모님이 집에 오시면 장난스럽게 불렀던 배일호의 `장모님'이란 노래 대목이 생각나 헛웃음을 짓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나의 장모님/ 정말로 달라졌어요 아내는 지금/ 그렇게도 상냥하고 얌전하더니/ 너무나도 변했어요 무서워졌어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장모님 우리 장모님' 아 그때가 참 그립습니다.

아들만 두어 장모님 소리 못 듣고 사는 아내도 할머니가 된지 오래입니다. 그 아내의 얼굴과 빚은 음식에서 장모님 얼굴과 맛이 우러납니다.

장모님 고맙습니다. 또 노래합니다. `따님이 좋아졌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장모님 우리 장모님!'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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