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산과 것대산 사이, 봄이 오면 목련꽃향기 그윽한 곳에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새해를 며칠 안 남긴 섣달 겨울날. 어머니는 홀로 하늘 여행을 떠나셨고, 산산이 흩어졌던 몇 안 남은 가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습니다.
슬픔의 정도에 따라 쏟아내야 할 눈물의 정량은 하늘의 뜻에 의해 정해진 듯합니다.
촛불과 향불이 겹지 않도록 비울 수 없는 영정 앞에서 삼켜야 했던 홀 상주의 안간힘은 상례를 마치면서 휩쓸듯이 찾아온 감기와 비염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내 몸 안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과 콧물에 쩔쩔매면서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긴장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애통함을 견디게 해주는 위로임을 깨닫게 되었고, 울음이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님 하늘여행에 가장 커다란 배웅일 수 있음을 절절하게 새기고 있습니다.
청주 목련공원에, 어머니는 지상에 있고, 16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여태 땅 속에 계십니다. 사방이 한 뼘을 간신히 넘기는 정육면체의 공간에 어머니의 세상은 분골되어 닫혔고, 아버지는 내가 딛고 있는 평면의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러 해체된 삶으로 멈춰 있으니, 살아남은 가족들에게는 상징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끝내 놓지 말아야 할 기억일 수밖에 없습니다.
칠석날을 하루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서러움을 참아야 할 인내심도 필요 없었고, 눈물을 삼키기 위해 숨을 참는 대신 살아있는 형제들과 슬픈 눈빛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늙은 큰누이와 단 둘만 남아 홀 상주가 된 설움을 감출 수 있게 하는 것은 모진 추위에 떠난 어머니의 겨울 하늘여행 덕분입니다.
애비의 눈물을 따라 저절로 통곡하는 딸들을 애처로워 하는 몹쓸 부정(父情)은 눈을 찌르는 삭풍에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로 숨길 수 있고, 별리(別離)의 떨리는 몸과 마음은 뚝 떨어진 한파 탓으로 감출 수 있으니, 어머니의 내리사랑은 끝끝내 지고지순입니다.
목련공원은 나에게 언제나 새벽입니다.
혼잡을 피하기 위한 명절이거나, 그렇지 않은 기일(忌日)때, 가끔씩 그리움에 사무칠 때도 목련공원은 언제나 새벽에 찾아 갑니다.
이승과 저승이 끝나고 시작되는 시간과 공간이, 밤을 지나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순간 무덤들이 즐비한 장소와 어울린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살아남은 인적을 피해 가장 먼저 시공을 초월하는 경계의 순간에 오롯이 만나는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는 온전한 전설이고 신화입니다.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인다./ 어느 틈에 주변에는/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中>
평면의 땅 아래 누워 있거나, 신식의 목련당 건물에 켜켜이 쌓인 수많은 입체식 상자에 원통형의 분골함에 투명하게 잠들어 있는 모든 넋에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추모가 어울리는 목련공원의 이번 설날은 포근했으나 서늘했습니다.
그러나 그 새벽길은 어두웠음에도 눈앞이 깜깜하지 않았으니, 두루 기적이고 신화이며 전설인 어머니의 기억이 아직은 생생하게 남아 있는 덕분입니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있던 갓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들쳐 업고 버선발로 달려 나를 살린 그 경각의 숭고한 순간을 어머니 살아생전 나는 잊고 살았습니다.
“화장해라.”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겨우 지킨 뒤 평화의 은총을 기원하는 날의 맑은 후회와 서러움.
등 뒤로 새날의 기운이 가득한 햇살. 살아남은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의 끝에 목련공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의 넋은 내 가슴에 기억으로, 상징으로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