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연꽃과 불교문화
<172> 연꽃과 불교문화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4.1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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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재생·부활·신성함 '상징적 의미' 부여

BC 3세기쯤 마우리아조 3대 아소카왕 연화좌서 시초

건축·공예품 등 사실적 묘사·도식화된 문양으로 사용


불교미술이 동쪽으로 전파됨과 더불어 각종 문양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불교에서는 연꽃에 재생과 부활, 불멸의 표상으로 내세에 신성한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꽃으로 간주되었다.


동·서문명 교류에서 가장 오래되고 널리 유포된 것은 연꽃문양이다.

이 연화문(蓮花紋)은 인도와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한 불교문명권과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오리엔트 문명권, 그리고 그리스-로마 문명권 등 광대한 지역에서 공예품과 건축에 사실적인 묘사와 도식화된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연화문의 최초 출현은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상한선은 기원 전 4900년으로 추산된다. 숙근초(宿根草)의 수생(水生)식물인 연(蓮)은 장식미술에서는 국제적으로 '로터스(Lotus)'로 통칭하고 있다.

나일강이 범람한 뒤에 수려하게 피어나는 연꽃에 여러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재생과 부활, 불멸의 표상으로 내세에 신성한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꽃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국화인 연꽃 문양은 고분벽화와 금은 세공을 비롯한 회화와 건축, 공예 등에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고대 인도에서도 아리아인이 이주해오기 이전의 원주민 사회에서는 태양과 연관시켜 연꽃에 대한 숭배의식이 나타났으며 기원전 10세기 힌두교에서는 태양신의 소유물이라고 여길 만큼 신성시되고 만물을 잉태하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 같은 상징성을 띤 연꽃은 기원 전 7세기경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이집트와 인도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집트의 수련(睡蓮)인 백련(白蓮), 청련(靑蓮)과 인도 원산인 홍련(紅蓮)이 서로 교류되었다.

그러다가 인도에서 불교가 일어나면서 이 꽃의 상징성이 불교의 교리와 부합되어 불교의 상징화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불교회화의 공예문양으로 발전하였다.

가장 오래된 인도의 연화문은 마우리아조의 제3대 아소카 왕을 기리기 위해 BC 3세기에 세운 기념석주의 연화좌(蓮華座)에 나타난다.

이것이 불교문명권에서는 연화문의 시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수일은 실크로드학에서 불교의 동전과 함께 서역을 거쳐 중국을 비롯한 극동지역까지 전파된 연화문은 주로 와당(瓦當)이나 불상, 벽화에서 장식문양으로 사용되었는데 불교와 관련되기 때문에 인도가 원산지인 홍련을 모본(模本)으로 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불교문화 유적이 파괴되고 재생 확대되는 과정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불타의 이념이나 설교에는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형상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석가세존의 진정한 의도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오히려 그와는 상반되는 가르침을 남기고 갔으나 그리스풍의 헬레니즘 영향으로 유럽문화의 뿌리인 그리스 박트리아계 사람들에 의해 인격화되고 형상화되는 과정을 겪으며 숭배의 대상인 불상과 불화를 남기게 된다.

로마제국을 비롯한 중근동지역에서 수많은 선지자들과 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했으나 지금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과 인간들의 속죄를 위한 하나의 상징으로 고착된 이미지가 되고 말았다.

고대 이집트의 국화이며 아리아 인들이 이주하기 전 인도 원주민들과 기원전 10세기 이후의 힌두교인들이 신성시했던 연꽃은 현재 불교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적 근원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보편적인 일들이 특정한 성인의 탄생으로 인하여 고착된 관념을 갖게 되고 편견의 벽에서 자유스러워야할 종교적 이념이나 가르침이 오히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고 속박하는 경우가 될 수 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문화의 본류가 검은 대륙 이집트에서 건너와 이집트의 많은 신들이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로 둔갑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희로애락과 선악을 모두 표상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이집트 신들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질투하여 서로 죽이기도 하며 심지어 사랑에 빠져 미혼모의 갈등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는 아프로디테가 되고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네이트 여신은 그리스로 건너가 아데나 여신으로 태어난다.

사후에도 육신과 영혼이 생전의 상태로 부활되어 불멸한다는 미라의 풍습은 오시리스 신앙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영육 부활의 신앙은 디오니소스 신화에 이입되어 후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내세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아테네 국립박물관에서 보았던 이집트 유물들의 조각이나 부조의 형상을 보면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서구문화의 뿌리를 캐어보면 거기엔 번성했던 고대 이집트 문화가 기층을 이루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리스풍의 헬레니즘 문화를 가꾼 그리스인들은 유럽문명의 터전을 만들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이집트 문명은 그리스와 로마에 영향을 주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대제국 로마를 탄생시켰고 로마제국의 찬란한 문명은 유럽대륙에 전파되어 라틴문화를 꽃피웠다.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 해상권을 장악한 선진 이슬람문명은 중국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동서 문화의 중요한 교류자로서 세계문화에 기여하였다. 후진 유럽문명에 중국과 이슬람문화를 전해주어 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문화란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교류하고 변이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총체적인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특히종교문화는 인류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정신문화로서 동서 이념논쟁이 사라진 현시점에서 종교간 갈등은 21세기가 극복해야 할 가장 커다란 현안 중에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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