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이 풀리면’을 작곡한 오동일은 193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성악가를 꿈꿨으나 변성기를 거치며 성악 대신 작곡으로 진로를 바꾸어 서울음대에 진학했다. 1958년 서울대학교 작곡과를 졸업한 후, KBS 라디오 프로그램 ‘금주의 노래’에서 편곡을 맡았으며, 이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2년간 음악교육학을 이수한 후 1961년 청주교육대학 강사로 부임했다. 이후 전임강사를 거쳐 교수로 13년간 재직하다가, 1974년 강원대학교 음악교육학과가 창설되면서 자리를 옮겼고, 1998년에 정년을 맞았다.
‘강이 풀리면’은 1967년, 오동일이 청주교육대학에 재직 중일 때 탄생한 곡이다. 그는 당시 청주 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청주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청주 최대의 냇물인 무심천 옆에서 하숙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서울에 있어 만나기가 어려웠지요. 퇴근 후나 이른 아침에 적적할 때면 무심천 둑을 따라 산책을 다녔습니다. 산책길에서 시를 외곤 했는데, 특히 파인 김동환의 시를 좋아해서 자주 암송하곤 했지요.”
어느 날, 무심천변을 걷던 오동일은 1925년 발표된 파인의 시집 『국경의 밤』에 수록된 김동환의 시 「강이 풀리면」을 흥얼대다가 문득 악상이 떠올랐다. 하숙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곧바로 오선지에 악상을 적어 내려갔고,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그의 첫 예술가곡이자 대표작이 되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시 속의 ‘님’을 향한 그리움과 하나가 되어 완성된 곡이었다.
김동환은 1901년 함경도 경성에서 태어나 북방의 정서를 문학으로 담아낸 시인이다. 그는 1924년 문예지 『금성』에 시 「적성을 손가락질하며」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국경의 밤』, 「남촌」, 「북청 물장수」, 「송화강의 뱃노래」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동중학을 거쳐 일본 유학 중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동양대학교 문과를 중퇴하고 귀국한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1929년에는 종합월간지 『삼천리』와 문학지 『삼천리문학』을 창간하였다.
해방 후 그는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친일 인사로 지목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후 6.25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동환의 딸 김채원의 인터뷰에는 북한에서의 아버지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파인은 어느 작은 잡지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는데, 말없이 묵묵히 맡은 일만 하셨답니다. 아빠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지인이 재혼을 권했지만, ‘이 처지에 식구만 들이면 뭐 하느냐’라며 거절하셨대요.”라고 회상했다. 김채원은 『납북 인사의 생활실태』라는 책에서 아버지 김동환의 납북 후 생활을 기록했고, 1971년 한국일보 8.15 특집 ‘북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아버지에게 공개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편, 오동일은 1971년에 ‘강이 풀리면’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무심천’을 주제로 한 합창곡을 발표했다. ‘아득히 보이는 한 벌을 헤치며 흐르는 물소리 무심도 하여라’로 시작하는 가곡 「무심천」은 지금도 청주 관내 공공기관 행사에서 자주 불린다. 이 곡을 통해 김동환의 마음속 강물과 청주의 젖줄 ‘무심천’이 하나 되어 흐르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이 좋은 봄날, 김동환과 오동일의 ‘강이 풀리면’을 부르며 ‘무심천’을 걸어보자. 봄은 어느새 내게로 와 꽃으로 피어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