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에는 두 가지 UNESCO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그 하나는 2001년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요, 다른 하나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와 함께 목록에 오른 속리산 법주사가 바로 그것이다.
법주사는 금산사와 함께 진표율사에 의해 중흥된 대표적인 미륵도량이다.
법주사에 가면 장대한 금동미륵대불을 만나게 된다.
사적에는 `신라 혜공왕 12년인 776년 진표율사가 7년여에 걸쳐 금동으로 조성했던 미륵불이 천년을 넘게 법주사를 지켜왔으나, 구한말인 187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한 당백전 주조를 목적으로 훼손하였다.'라 전한다.
일제말 1939년 법주사 주지 석상스님이 태인사람 김수곤 거사의 후원을 받아 복원에 착수하였다.
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맡았다. 이보다 조금 앞서 1936년에는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 제작에 착수하여 1938년 완성한다.
또 이듬해인 1937년에는 고향인 청주 용화사와 법주사 미륵불 복원 계약을 맺고 1940년 10월 완성을 목표로 1939년 3월 법주사 미륵불 복원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을 당시 1939년 1월 10일자 조선일보의 기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처음이라 외국에서도 보기 드믄 큰 것을 제작키로 됐다. 재료는 콩크릿으로 하는데 돌로 쌓아 가지고 콩크릿으로 하는 것으로 독일의 괴스막이 이런 재료로 만들었다 한다. 이 미륵대불은 조각이라기보다는 건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체격이 건전한 미륵을 만들려는데 옛날의 우리 조각으로 말하면 `신라 것'에 가까운 것이 될 것이다.”
정지용이 태어난 1901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김복진은 1920년 배재고 졸업후 동경미술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조각공부에 입문한다.
미술학교를 졸업하던 1925년, 귀국후 처음 찾은 곳이 토함산 석굴암이다.
그 내용은 `경주 석굴암 스케치라는 제목으로 시대일보를 통해 소개된다.
그가 근세미륵의 좋지 못한 체격에 대한 불만을 신라조각의 당당한 체격으로 해소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관은 1934년 배화여고 교사였던 허하백과 결혼하여 슬하에 `보보'라는 애칭의 딸 김산용을 두었으나 두 살 되던 때 이질로 잃고 만다.
이후 정신을 다잡고 “법주사 미륵대불과 청주 용화사 불상을 마무리하겠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법주사 미륵불 완공을 2개월 앞둔 1940년 8월 정관 역시 이질에 걸려 우리 곁을 떠난다.
이후 미완의 미륵불복원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지지부진하다가 1963년 정부의 시멘트 지원에 힘입어 김복진의 애초 계획도에 따라 마침내 1964년 마무리된다.
이후 1990년, 원모습 그대로 재료만 바꾸어 청동불로 재건하였고, 2002년, 2011년, 2015년 3차에 걸친 개금불사를 겨쳐 지금의 금동미륵대불로 나타난다.
김복진은 앞이 까맣게 보이지 않는 식민지시대에서의 구원과 희망을 `미륵'에서 찾았다.
그 결과 정관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과 법주사 미륵불이 우리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고향인 팔봉산 자락에 그의 생가와 묘소가 있다.
Dr.Jung의 호서문화유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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