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63>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63>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4.1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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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백곡공소

오랜풍상 이긴 천혜 피난처엔 고즈넉한 축복이…

▲ 병인박해당시 많은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선조들의 혼이 깃든 백곡 천주교회.  시누이 올케가 나란히 누워있는 백곡공소 백곡 공소는 충북 진천군 배티 사적지 인근에 위치해 있다. 진천 톨게이트에서 10여분 쯤 달리다 보면 '삼박골 비밀 통로'라고 적인 푯말이 보인다. 이 비밀통로는 병인박해 당시 신자들이 은밀하게 넘어다니던 고갯길이다. 진천·천안·안성 경계 이룬 삼각점 당시 험난한 산과 깊은 골짜기로 많은 신자들이 피신해와 교우촌을 이루고 신앙을 지킨 선조들의 혼이 깃든 곳으로 진천군, 천안, 그리고 경기도 안성이 경계를 이루는 삼각점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사통팔달 도로가 시원스레 공소앞을 가로지르고 있지만, 박해 당시에는 지세가 험해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위치 또한 각 지방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교통이 편리했기에 박해때는 은밀한 연락이나 밤을 틈탄 도주가 용이했던 것이 교우촌이 형성되기에 아주 적합한 여건이었음을 말해준다. 시골 마을과 조화를 이루어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는 백곡공소는 모진 풍상을 겪어 왔음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박해의 터전을 지키고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박해를 피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배티성지 인근에서 50여명의 교우들이 순교를 했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수의 교우들이 이곳에서 박해를 피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특히 백곡에서 조금 떨어진 '삼박골'은 배티와 백곡을 잇는 통로로 당시의 교우들의 통행로였다. ▲ 근엄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길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예수성심상.

백곡공소에는 두 기의 묘가 깔끔하게 단장되어있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남원 윤씨 바르바라와 밀양 박씨 바르바라의 묘이다. 이 두사람은 서로 시누이 올케지간으로 함께 신앙을 증거했으며, 함께 순교하여 이들의 유해는 1977년 이곳으로 이장돼 같은 곳에 나란히 누워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성모상이 보인다. 요란스럽거나 웅장하지 않지만 주변 환경과 잘 어울려 순교자들의 신앙앞에 순례객들은 조용히 묵상할 수 있으며, 길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예수성심상은 근엄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순례객을 반긴다.

1871년까지 한국 최대 박해 일어나

 병인박해

병인박해는 1866년 고종 3년부터 1871년까지 대원군 정권의 대규모 가톨릭 탄압으로 한국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이다.

대원군은 처음부터 가톨릭을 탄압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서양에서 전래된 그리스도교를 통해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들과 교류를 할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도 가톨릭은 부인 민씨가 당시 믿는 종교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톨릭 주교인 베르뇌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므로 대원군 입장에서 외교적인 이용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또한 궁중에까지 가톨릭 신자들이 늘어나는 모습과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군와 보수층들의 반발에 대원군은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때 김면호·홍봉주 등의 천주교도들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책을 건의하여 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었다.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조·프조약을 체결하고 나폴레옹 3세의 힘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 방안으로 주교 베르뇌를 만날 것을 건의해 받아들여졌으나, 지방에 있던 베르뇌가 서울에 도착하기까지의 한달 사이에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이유는 영국이 청나라를 굴복시켜 강제로 문호를 열게 하였고, 영·프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살육(洋人殺戮)에 있었다.

대원군, 쇄국양이 사교금압 전환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 소식은 반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고 천주교 탄압을 결심했다.

박해가 극심해지자 리델신부는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P.G. 로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로즈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이로 말미암아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했다. 또한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을 계기로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은 더욱 심해졌다.

한국 최대의 박해이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박멸이라는 국내 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급격하게 밀려오는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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