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61>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61>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4.04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1.배티성지

골짜기마다 최양업 신부 '신앙절개' 서린곳

▲ 진천군 백곡면 노고산 아래에 위치한 배티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첫번째 신학생이며 두번째 사제인 최영업 신부를 기념한 곳이기도 하다.  순교의 땅 배티성지 진천군 백곡면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를 기념한 곳이다. 배티는 마을 어귀에 꿀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 고개'로 불리다가 한자로 이치(梨峙)라 했고, 이치의 순수 우리말인 배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13년이다. 당시 충남의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元)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배티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그 후 183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배티 일대 교우촌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갔다.  배티 교우촌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삼박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발래기, 통점, 동골, 새울,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지구머리, 지장골, 굴티 등 10여 곳에 이른다.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된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다. ▲ 초가로 복원된 최양업 신부의 성당 겸 사제관.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와 뼈가 안치되어 있는 경당.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순교자 55여명(교회역사에 기록된 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을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다.

1870년 복음의 새 터전 닦아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배티에서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 나갔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한국의 까따꼼바이며, 복음의 진리를 온몸으로 살아간 신앙의 현장이며, 수많은 혈색 순교자와 백색 순교자를 배출한 순교의 땅이다.

 최양업 신부와 배티 교우촌

최양업(1821-1861)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두번째 사제이다. 그는 1836년 모방 나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서구사상을 처음으로 배운 한국 최초의 유학생이다. 그는 1849년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후 유학을 떠난 지 13년만인 1849년 12월 귀국한 최 신부는 용인 학덕골과 진천 동골에 살던 동생들을 찾아본 후 즉시 신자들을 찾아 나섰다.

1857년 무렵에는 배티와 절골 주변의 삼박골(양백리), 용진골(용덕리), 정삼이골(용덕리), 발래기(백곡면 명암리), 명심이(명암리), 지구머리(백곡면 사송리), 새울(이월면 신계리), 지장골(진천읍 지암리), 굴티(문백면 구곡리) 등지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깊은 산촌이었던 까닭에 성직자들의 휴식처로 알맞아 M.A.프티니콜라(朴德老) 신부가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목회(사목)활동의 중심지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61년 최양업 신부가 사망하고 프티니콜라 신부도 배론의 신학교로 떠나자 한동안 성직자가 없다가 경상도 서부지역을 담당한 칼래(Calais) 신부가 1866년 문경의 한실 교우촌에서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으로 탈출해왔다. 병인박해는 배티 인근의 교우촌에 큰 타격을 주어 1866∼1868년 사이에 이 지역 출신, 또는 주민 중 순교한 사람은 오반지(바오로), 이 생원을 비롯해 27명에 이른다.

흩어진 신자들 모여 교우촌 재건

1870년 무렵 흩어진 신자들이 다시 모여 교우촌을 재건했다. 1888년에는 E.C.두세(丁加彌) 신부에 의해 배티 공소가 설립되었고, 이후에 새울과 용진골, 삼박골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후 이 곳 공소는 여러 명의 성직자를 배출하였고, 1901년 안성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956년 이후에는 모두 진천 본당 관할 공소로 변경되었다.

1970년 청주교구에서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와 함께 인근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을 조사하여 현재의 위치에 경당을 지었고, 1993년 4월에 배티 사적지 전담 신부가 된 장봉훈(張奉勳·가브리엘) 신부가 성당 건립을 추진해 1997년 4월15일에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서는 양업교회사 연구소를 설립하고, 최양업 신부의 시복 운동과 배티 순교자 묘역을 조성할 계획도 추진되고 있다.

   
▲ 병인박해 순교자 유(劉) 데레사의묘.

 배티성지 '양업영성관'

피정의 집은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따 '양업영성관'으로 명하였다. 양업영성관은, 박해시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모여 살던 옛 교우촌 가정의 신앙을 본받아 기도와 성서 묵상에 매진하고, 무명 순교자의 삶을 가정 공동체에 구현하며, 초대 교회의 이상 공동체인 교우촌 문화를 전승하고 최양업 신부의 현양사업과 교우촌 선교, 문화사업 수행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