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2.1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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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교의 방아다리에서 쓴 편지
김 익 교 <전 언론인>

우수(雨水)가 지났습니다. 우수는 말 그대로 빗물입니다. 그러니까 입춘이 지나면 비가오고 그 빗물이 얼었던 땅을 녹이니 만물이 소생할 채비를 할 때라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며칠 봄을 시새움 하는 날씨 속에도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매화도 갈라진 망울 사이로 하얀 얼굴을 살짝 내비칩니다.

남쪽으로 날아 갔던 기러기들의 행렬이 다시 북쪽으로 이어지고 냉이, 꽃다지, 쑥 등 봄나물들이 칙칙한 묵은 옷을 벗고 새옷으로 갈아 입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 되면 오고 가는 자연의 순리따라 세월은 참 빠르기만 합니다.

농촌도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논밭으로 거름을 실어 나르는 트랙터의 굉음과 '산불을 조심하라'고 수시로 오가는 방송차량이 겨우내 게을렀던 농부들의 일손을 재촉합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손가락만큼 자란 고추묘도 시간맞춰 물을 줘야하고 감자 심을 밭갈이도 해야 합니다.

이번 주부터 비닐하우스로, 약초포지로, 밭으로 일거리를 챙겨 봤습니다. 고추대 뽑고 비닐 걷어내고 밭고랑도 태워야지, 하우스 손질에, 거름도 실어와야 하는 등 널려 있는 일거리가 농촌으로 온 첫해나 7년된 지금이나 마음을 무겁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는 횟수가 잦아진 이웃들도 "겨우내 잘 놀았는데 언제 눈 와유." 얼마나 농사일이 지겨우면 이제 시작인데 눈 오는 겨울을 찾겠습니까. 하기사 죽어라고 일해봤자 손에 쥐는 것은 없고 그저 물려받은 땅으로 농촌에 살면서 배운 게 농사밖에 없으니 평생을 해야할 일인데도 진저리가 날 만도 하지요.

엊그제 우리에게 사랑의 평범함과 위대함을 보여주신 큰 어른이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을 하셨습니다. 생전의 인자하신 모습 그대로 영면하신 어른을 조문하는 전현직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의 면면이 TV화면에 비쳐지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생전에 어른께서 "국민이 있은 후에야 정치가 있습니다. 말로만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우리의 말을 듣고 새기는구나 라고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저분들은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지.

혹시 '국민의 뜻에 따른다'고 말로만 하고, 속으로 안 되는 일은 모두 '국민들이 자신들의 뜻을 안 따라 주기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을까요.

입만 열면 '국민들을 위해서'라고 큰소리 치시는 모든 분들 보셨지요. 전국에서 이어지는 보통 사람들의 조문 행렬을, 이것이 바로 그분이 베푸신 사랑의 족적입니다. "국민이 열심히 해야할 것이라"는 큰어른이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 들으시길 바랍니다.

평생을 약자의 편에 서시고 암울하고 혼탁한 사회에 빛이 되주셨던 '혜화동 할아버지'는 이제 당신을 맡아주시길 그렇게도 원했던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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