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③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③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2.17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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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송부일의 문화재 돋보기
경회루 지난해 열린 세종대왕 어가행렬 재현모습.
눈길 닿는 곳 마다 베일벗는 타임캡슐

궁궐 권역별 조선시대 역사·문화·예술 그대로

동서 128m 연못에 세워진 2층누각 경회루 자연미 물씬
동궁전, 임진란때 폐허… 고종임금 경복궁 중건때 복원

송 부 일


근정전 동쪽 행각 융문루를 지나면 동궁전이다.

동궁은 왕의 계승자인 세자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왕이 머무는 내전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궁 또는 동궁전이라 한다.

원래는 궁궐 밖에 있던 것을 세조가 궁 안에 동궁전을 짓고 옮겨와 왕자 수업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진란으로 동궁이 화재를 입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동궁을 중건하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시정 5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를 연다는 구실 아래 동궁을 헐어 버렸다. 그 후 1999년 세자의 공식 활동공간인 동궁전 자선당, 비현각을 다시 복원하였다. 자선당은 28칸으로 공포와 익공의 구조로 복원했는데 격이 높은 건물이다.

동쪽 동행각이 19칸 서행각이 19칸 중 행각이 13칸 그 외 남행각이 있다. 또한 세자의 공부 공간인 시강원이 26칸 규모로 비행각 소속 건물이다.

비행각은 12칸 무익공이며 정면6칸 측면 2칸의 소박한 건물로 둘레에 동행각18칸 서행각 12칸 남행각이 12칸 외행각이 12칸에 측간 2칸 반이 시설되어 있다.

또한 동궁에 속하여 거처하는 25칸의 장방과 별감방 52칸 원역처소 32칸 오상방 41칸 통장처 41칸 무기숙청 10칸 춘방 16칸이 딸려 있다.

이 궁의 주인인 세자는 국왕의 본부인의 아들로 적장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고종 때 경복궁 중건시 복원된 수정전

동궁에서 사정전을 뒤돌아 서쪽 문을 나오면 높직한 기단 위에 커다란 수정전이 버티고 있다. 단독 건물로 40칸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다섯 벌대 기단이 당당하고 중앙 앞으로 튀어나온 방단이 네 벌대 높이로 넓게 월대를 만들었다. 정면 셋, 좌우 하나씩 돌층계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가운데 층계에 소매돌을 설치하였다. 오르고 내리는 8단 중에 4단만 소매돌이 이어지고 나머지는 노출시켰으며 별다른 장식없이 앞쪽에 석고대를 세웠다.

수정전은 원래 집현전으로 세조가 집권하자 이듬해 1456년 폐기시켰다. 세조 등극시기에 집현전 학자들과 사육신 등이 이곳 출신으로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건물만이 유지되어 오다가 임진란으로 화재가 나 폐허된 것을 고종 때 경복궁 중건 시 복원하여 집현전을 수정전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고종 초기 수정전을 왕이 기거하는 연거지소로 사용하다가 신료들이 정무를 보는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광복 후 국군기무처 및 내각 청사로 사용했다.

수정궁 뒤로 돌아가면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회루 연못 안에 돌난간 축대를 쌓고 2층 누각을 만들어 화려하게 누각을 지었다.

태조가 처음 경복궁을 신축할 때 습한 자리에 연못을 파고 다락집을 지은 곳이었다. 그 후 다락집이 기울어져 태종이 공조판서 박자청을 시켜 연못을 크게 파서 넓히고 그 안에 축대로 내모난 섬을 만들어 그 위에 경회루를 아름답게 지었다.

태종은 큰 누각이 완공되자 누명을 경회루로 하고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편액을 쓰게 하였다. '경회', 그 뜻은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서로 만난다는 뜻이다. 경회루는 조선 초기에 몇 차례 중수하여 오다가 세종 때 다시 짓는 것과 같은 대중수를 하였다.

성종 6년에는 경회루 돌기둥에 용과 꽃 조각을 하였는데, 유구(오키나와)에서 온 사신이 돌기둥을 보고 감탄한 사실이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어 얼마나 웅장하였나 생각된다. 연산군은 연못 서편에 만세산을 쌓고 황룡주를 타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하는데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작은 연못에서 금으로 만든 배를 탔을까 상상된다.

경회루는 남북이 113m 동서 128m의 연못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2층에 마루를 깔았다.

바닥에 높이가 서로 다른 3단으로 나누워 졌는데, 중앙 3칸이 높고 이를 둘러싼 12칸이 다음이며 외각 20칸이 낮다. 가장 높은 단이 임금의 자리이고 신분에 따라 자리가 결정된다.

높이가 달라지는 구역에 한번 젖혀 들어 올리는 분합문을 달았는데 문짝을 들어 올리면 터진 하나의 공간이 된다.

'경회루전도'에 의하면 2층에서 가장 높은 내내진3칸은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를 말해주고 이를 둘러싼 8개의 기둥은 팔패를 말해 준단다.

다음 내진(內陳) 12칸은 1년 열두 달을 뜻하며, 이를 둘러싼 열여섯 기둥사이의 문은 각 네 짝으로 모두 64짝이 되어 64쾌의 뜻이 있다. 또한 기둥 밖 외진 20칸 회랑으로 둘러 싼 24개의 외진기둥은 24절기를 말한다.

위층을 떠받치고 있는 아래층의 기둥은 외진기둥 24개 내진 기둥, 내내전 기둥 8개, 이들을 합하면 48개 기둥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하고 있다.

외전기둥과 그 밖의 기둥들은 민흘림기둥은 같지만 형태가 다르다.

외진각 기둥은 사각기둥인데 내진기둥과 내내진 기둥은 둥근기둥이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원리로 건축하였음을 상징한다.

경회루는 원래 담장이 둘러져 있었다. 탁 트인 공간에 넓은 길이 있었다. 출입문도 여러 개였다. 경회루 동쪽의 함흥문, 서쪽의 천일문, 남쪽의 경회문 등 출입이 가능했지만 이 문들은 교태전, 강녕전으로 연결되었다. 경회루는 누지에 섬을 쌓고 섬을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에 돌다리를 셋이 간격을 두고 가설되었다. 세 돌다리 중 남쪽 중간 것과 북쪽 것에 비해 모양이 조금은 다른데, 남쪽은 임금과 사신들이 다니고 나머지는 신료들이 다니게 하였다. 다리를 건너 희고 늘씬한 돌기둥이 서 있는데, 돌다리보다 한 단 높게 네 벌대 위에 네모의 기둥인 방형석주가 서 있다. 이 방형 돌기둥을 지나면 안통을 다시 한 단 높이고 위에 돌기둥을 세웠는데 네모난 받침에 둥근 기둥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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