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쉼표
  • 박윤미 노은중 교사
  • 승인 2023.03.2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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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윤미 노은중 교사
박윤미 노은중 교사

 

오랜만에 카페에 혼자 앉아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하얀 잔 안에는 보드라운 갈색 거품 위에 하얀 나뭇잎이 떠 있고 잔 옆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다. 멜버른에서 온 커피 원두에 대해 맛과 향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좋은 원두로 정성껏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나는 나름 커피 애호가다. 20년 이상 커피 믹스를 마셨다. 어느 날 뚝 끊고 아메리카노로 갈아타서 매일, 종일 홀짝인 지 꽤 되었다. 그런데 지난겨울 코로나를 겪은 이후 커피 맛이 별로다. 아마 후각이 둔해져서인가 보다. 매번 기대하고 매번 실망하며 아주 예전에 무언가 좋게 느꼈다는 사실만이 기억난다. 요 며칠 동안은 아예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

깊은 향과 부드러운 맛을 기대하며 한 모금 마셔본다. 하얀 나뭇잎이 조금 작아진다. 요즘 바리스타에도 관심이 생긴다. 언젠가 카페지기가 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커피 맛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서다. 하나 속에 들어 있는 미세한 하나하나를 구별해 내는 그 경지가 어떤 것인지 호기심이 생긴다. 커피가 내게서 멀어지자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니, 아이러니다.

충청타임즈에 한 달에 한 편씩 쓰기를 6년 동안 했었다. 작은 웅덩이 물을 다 퍼 쓰고, 바닥을 박박 긁는 것 같아 잠시 쉬기로 했다. 그렇게 꼬박 1년이 지나 다시 써야 하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또다시 머리에 쥐나는 일 만들지 말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정은 어려워졌다. 다음 날 아침 미련을 떨쳐보려 산으로 갔다. 거절은 빠르고 확실할수록 좋다고 했다.

`엄청 고민했습니다. 고민이 길었던 것은 쓰고 싶어서겠죠? 올해 공부를 새로 시작하는 게 있어서 병행하기가 너무 어렵겠다 싶은데'

마지막 한 마디를 썼다 지웠다 하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멈춰 섰다.

`일단 시작해볼게요. 힘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빠르게 쓰고 전송 화살표를 꾹 눌렀다.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후련하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입춘 지난 산자락에 새들이 와글바글 노닐고, 한가로이 지나던 까투리 한 마리가 나를 보고 포르르 날아올라 간신히 산비탈 위에 올라서더니 다시 총총 제 길을 간다.

오늘 생활 악기 오케스트라에서 연습한 곡 중에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가 있었다. 지휘자님은 이 곡을 편곡하며 가사를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그동안 이렇게 의미가 좋은 곡인 줄 몰랐다고 곡을 소개했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 산으로 올라가 소리 한 번 질러 봐, 누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어.'

플루트로 이 곡을 연주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는데, 마음이 빼꼼 열리는 것이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내게 건네는 위로 같다.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하던 일을 멈추고 여행을 떠나 봐'

그냥 신나는 춤을 출 수 있는 좀 요란한 곡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누군가를 위로할 때 이 곡을 들려줘야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지휘자님은 곡마다 어떻게 해석하여 생명력 있는 음악으로 만들지 공들여 설명해 주신다.

“음악에 쉼표 없이 음표만 계속 있다면 음악은 완성되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계속 갈 수는 없죠? 그러면 쉼표는 왜 필요할까요? 쉬는 건 에너지를 얻는 시간입니다. 그래야 그다음 일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쉼표 다음의 음표는 늘어지지 않게, 힘있게 연주해야 하는 겁니다.”

희비가 엇갈리는 세상 속에서 내일이 다시 찾아오기에 우리는 희망을 안고 사는 거라고,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외치며 클론의 강렬한 비트는 바로 쉼표에서 나오는 거였다. 나도 그 흥을 잘 표현해 보고 싶다. 악보 속 음표들이 신나게 춤추자고 짧은 꼬리를 막 흔들어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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