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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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혜 수필가
  • 승인 2023.03.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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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은혜 수필가
김은혜 수필가

 

남편 고향 뒷산에는 소나무 세 그루가 삼각형 거리를 두고 있다. 적당히 휘고 구부러져 맵시가 예사롭지 않다. 초야에 묻혀 있기에는 아까울 만큼 빼어났다. 소나무의 매력은 개성 있게 휜 가지도 한몫하지만, 갑옷처럼 생긴 검붉은 두툼한 껍질이다.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소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연유는 자신의 성장을 지켜봐 준 햇살이 머물다 가는 고즈넉한 작은 동산을 매각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어릴 적 동산의 주인이 되고 싶던 꿈이 등 떠밀어 득달같이 달려가 산다. 평소 거룩한 모습만 보이는 남편은 동산만 오르면 소년으로 돌변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닌다. 연장을 하나 둘 가지고 다니더니 아예 옹기 독을 가져다 숲에 비스듬히 묻고는 연장을 독에 보관한다. 우리만의 공원을 만든단다. 그 모습이 좋아 따라다니며 돕다 보니 독 뚜껑을 열면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하루의 살림살이가 다 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속담에 걸맞게 세 그루가 오대조 양주분의 쌍분을 독야청청 수호신처럼 굽어볼뿐더러 우리가 올 적마다 그늘이 품는다. 이 어른은 고을들로 명성이 알려진 학자이며 풍류까지 즐기는 선비셨단다. 후손인 우리는 풀포기까지 애정을 갖고 보듬었다.

세 그루 소나무 주변의 작은 나무를 베고 공사장에 버려진 큼직한 현관 유리문을 가져다 둥근 통나무 네 개를 놓고 올려놓았다. 탁자로는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일 퍼센트가 빠진 듯 보여 솔방울을 주워다 탁자 밑바닥을 숨겼다. 나머지 여러 개의 둥근 토막을 여기저기 놓으니 아담하고 정갈하다. 운치 있고 기품 있어 보인다. 푸른 소나무 아래 유리 탁자와 통나무 의자, 환상의 하모니다. 정자로 쓰임 받기에 흠잡을 데가 없다. 이동이 간편한 의자를 가져다 거리를 두고 멀찍이 정자 아래 놓았다. 그늘을 따라다니며 긴 시간 쉬기에 너무나 편하다. 간간이 지인들을 불러 고기 파티도 한다. 오는 이마다 소나무의 우아한 자태와 진한 솔향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럴 것이 우리도 이곳에 와 머물 적마다 신선이 부럽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세월이 흘러 아버님이 이순을 넘기시고 어머님도 산수를 넘자 생의 마침표를 찍어 이곳에 합장했다.

오늘도 보고 싶고 쉬고 싶어 정오가 되어 오른다. 가는 겨울을 배웅하듯 맑은 공기와 고운 햇살이 반긴다. 나뭇잎도 바스락 소리로 인사하며 발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유리 탁자에도 붉은 솔잎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한다. 평소 솔잎은 단풍이라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단풍잎으로 보인다. 소나무를 좋아하니 솔잎까지 예쁘게 보이는가 싶어 이리저리 보지만 여전히 단풍으로 보인다. 바람에 날리는 솔잎 하나를 주워 코끝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른 잎에서도 강한 솔향이 난다.

소나무는 살아있음을 이렇게 보여준다. 봄이면 뾰쪽한 잎눈과 솔방울을 키우고, 노란 꽃가루를 탁자 위에 소복이 쌓아 준다. 예쁜 몸짓이다. 샛노란 꽃가루를 볼 때면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송홧가루를 가득 품은 꽃술을 따 앞치마에 담던 옛 모습도 보여주고, 세 살 위 오빠가 매미처럼 매달려 낫으로 송기를 벗겨 주면 제비처럼 입을 벌려 받아 물고 단물이 없어져도 껌처럼 씹고 다니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가을이면 모든 잎은 자기만의 고운 쪽빛으로 갈아입고 자랑이나 하듯 바람결에 하늘거려도 이 소나무는 본연의 파란빛으로 고군분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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