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치른 `역사적 결단'의 대가
우리만 치른 `역사적 결단'의 대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3.03.1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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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1963년 독일 아데나워 수상과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양국 화해협력조약을 체결했다. 파리 엘리제궁에서 조약식이 열려 `엘리제 조약'으로 통칭된다. 1·2차대전을 비롯해 수세기에 걸친 적대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자는 정신을 담았다. 두 나라가 호흡을 맞추며 유럽의 번영을 견인하는 쌍두마차 역할을 하게된 시발점이 된 협약이다.

그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을 전후해 엘리제 협약이 여러차례 거론됐다. 한일 양국이 오랜 갈등을 정리하고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엘리제 협약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기대와 요구가 제기됐다. 우리 정부도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엘리제 조약을 참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양국이 담대한 양보와 폭넓은 배려를 통해 감동적인 화해의 문을 열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회담은 엘리제 조약의 흉내도 내지 못했다.

엘리제 조약은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과 지배에 대한 독일의 진정한 속죄와 반성에서 출발했다. 아데나워는 완고한 성품의 드골을 두차례나 사저로 초청해 교분을 쌓으며 협약의 물꼬를 텄다. 과거 청산을 위한 가해국의 적극적인 의지가 협약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피해국의 눈물겨운 화해 의지만 보였다.

윤 대통령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금을 제3자가 변제토록 하는 변칙적인 해법으로 한일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열었다. 예상대로 야당과 진보층으로부터 `저자세·굴욕외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상식적이라면 일본 정부는 윤 대통령이 겪는 고충을 덜어줄 후속 조치를 고민해야 했다. 기시다 총리도 “어려운 결단을 내린 윤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던만큼 파격까진 아니더라도 진일보한 호응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매정했다. 고대했던 선물 보따리를 받고도 그럴싸한 답례품은 내놓지 않았다. 답례는커녕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위안부와 독도 문제를 제기하고 일본의 입장을 전하는 무례를 범했다는 일본 언론의 소식도 들린다.

이번 회담의 성과로 셔틀외교 복원,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규제 해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정상화 등이 꼽히지만 양국이 혜택을 공유하는 호혜적인 조처들이다.

일본은 수출우대국인 `화이트리스트'에 한국을 복귀시키는 조치를 보류했다.

윤 대통령은 제3자를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한 후에도 직접 가해자인 일본 전범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고도 약속해 기시다 총리를 더욱 흡족하게 했다. 하지만 기시다는 윤 대통령의 국내적 입지를 배려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않았다.

우리 정부는 기시다 총리가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가 발표한 김-오부치 선언의 계승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국내 여론을 달래주길 간절히 기대했다. 당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한국민에게 고통을 준 사실을 시인하고 `통절한 반성의 마음으로 사죄한다'고 선언문에 밝혔다. 하지만 기시다는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상투적 입장만 되풀이 했다. 김-오부치 선언을 부정한 아베 담화까지 포함한 셈이니 사과로 보기도 어렵다.

경직된 한일관계 개선은 풀어야 할 절실한 과제이고 해법이 녹록지않은 것도 사실이다. 윤 대통령이 파격적 선택을 한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 동등하고 상호적이어야 한다는 외교의 기본이 반영됐는지는 돌아 볼 일이다.

정상회담을 전후해 기시다 총리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3주 연속 하락세다. `역사적 결단'의 대가라고 하지만, 왜 그 대가를 우리만 치르는 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우리와 이해가 상충할 수 있는 중국과 미국이 일본의 잔치판으로 끝난 이번 정상회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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