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3.03.1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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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낭만을 동경했습니다. 낭만적으로 살고자 했고 낭만적인 인간이고자 했습니다. 1995년에 발매한 최백호의 자작곡 `낭만에 대하여'란 노래를 제 노래인양 읊조리며 낭만인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중략)/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중략)/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 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몽환적인 선율과 서정적인 노랫말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잠재되어 있던 낭만적 끼가 분출되어서 입니다.

궂은 비 내리는 날이면 색소폰가락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을 시켜놓고 레지들과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개똥철학을 했으니 말입니다.

도라지 위스키는 1960~1970년대를 풍미했던 술 이름인데 도라지가 첨가된 위스키가 아니라 `도라지양조주식회사' 제품이라 그리 불렸던 거고 실제는 소주였습니다.

독주여서 한 잔 들이키면 금세 취기가 올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취기로 실연의 달콤함과 청춘의 미련을 날려버리기도 하고,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 첫사랑 소녀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잃어버린 것과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반추하며 통속적인 시를 쓰기도 했지요.

살아보니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시점이 나이 들었음의 기준점이었고, 70대가 인생완성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각설하고 낭만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를 뜻합니다.

혹자는 로망(roman)의 일본식 발음에 기인했다하지만 물결 랑(浪)과 질펀할 만(漫)이 결합된 한자어로 민초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정처 없이 떠돈다거나 방탕하다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다가 1910년 이후부터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꿈과 감정에 충실한 태도나 분위기로 환치되었습니다.

자유연애와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태도에 대한 긍정의 메시지를 담게 된 거죠.

문예사조로서 낭만주의는 사실주의에 밀려 퇴조했지만 고전주의적 질서와 계몽주의적 합리성에 저항하며 인간 감성의 해방을 추구해 `주의'는 사라지고 `낭만'이 남아 민초들의 삶과 정서에 비타민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널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낭만주의를 `과거로의 도피'로 본 것처럼 낭만이라는 말 속에는 혈기왕성했던 청년과 무기력한 노년 사이에 경험하고 사유했던 허탈과 고독과 퇴폐적 상념들이 내포되어있어 과거 퇴행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낭만이 현실 인식이 떨어지는 나이브(naive) 함의 대명사로 치부되기도 하고, 심지어 `낭만은 사치다'라고까지 폄훼되기도 합니다.

우리사회가 저출산 고령화로 몸살을 앓고 있고, 젊은이들이 결혼 출산 취업 등을 포기하고 사는 작금의 현실이 이를 부치깁니다.

정치가 이념에 함몰되어 미래를 어둡게 하고, 계층 간에 부익부 빈익빈은 날로 심화되고, 문화예술조차 한탕주의와 상업주의에 놀아나니 낭만이 설자리가 없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과 탐욕이 저주와 증오를 부릅니다.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인데 낭만의 원천인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측은지심(惻隱之心)마저 가뭄에 바닥을 들어낸 저수지처럼 메마르게 하니 오호 통재입니다.

노년이 되면 감성의 강도와 감각적인 수용능력이 저하되고 삶의 반경도 점점 좁아져 낭만보다 평온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낭만을 잃어버린 늙은 꼰대는 죽기보다 싫습니다. 하여 낭만에게 속삭입니다. 죽는 날까지 곁에 있어달라고.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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