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등인 날
내가 일등인 날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3.1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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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을 그린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 드라마에서 유독 마음이 간 인물은, 주인공 허준이 아닌 유도지였다. 유도지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의 아들이다. 아버지인 유의태마저 자신보다 허준의 실력을 더 신뢰하자 번번이 허준을 모함하는 인물로 나온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점점 못나져 가는 유도지를 보면서 나는 어쩐지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었던 허준이라는 벽 앞에서 그가 느꼈을 절망에 공감했다.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우리 중의 대부분은 유도지일 것이다. 노력해도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딸은 엄마 아빠의 간섭 없이도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아이였다. 아침을 하려고 나와 보면 이미 책을 펴고 공부를 하고 있던 아이였다. 그런 딸이 어느 날 많이 떨어진 모의고사 성적표를 내밀며 인생은 참 고단하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앞에 있는 애들은 더 열심히 하고, 뒤에 있는 애들은 또 눈에 불을 켜고 따라온다는 것이다. 잠시 숨을 골랐을 뿐인데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며 인생은 백 미터 달리기의 속도로 오래 달리기를 해야 하는 숨 가쁜 레이스 같다고 했다.

그렇게 코가 빠져 있던 아이는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와서 다시 열공모드로 돌입했다. 담임선생님께도 똑같은 하소연을 하자 선생님은 딸보다 훨씬 낮은 성적의 아이들을 보여주면서 “네 성적은 이 아이들에게는 천국의 성적이야. 이 아이들이라고 노력하지 않았겠어? 그럼에도 이만큼 밖에 할 수 없는 애들을 생각해 봐. 호강에 겨워 징징대지 말고 네 자리로 돌아가길 바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나를 앞지르는 사람들로 인해 못나 보이기만 하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동경일 수도 있는 것이다. 허준보다 못했지만 유도지도 실력 있는 의원이었다. 당대의 실력가인 아버지 유의태로부터 꾸준히 의술을 연마해온 유도지를 부러워하는 의원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허준이라는 높은 벽만 보았기 때문에 유도지는 자신의 능력을 바로 보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것이다. 실력향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허준을 질투하며 절망하는데 인생 대부분을 써버린 것이다.

글쓰기 주변을 어정거리면서도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는 나에게 가르침을 준 시인이 한 분 계시다. 그분은, 이생에 못 쓰면 다음 생까지 쓰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같이 글공부를 시작해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는 글을 아직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니 괜찮다는 것이다. 주변의 상황과 관계없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 산중턱 어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처럼 우직해 보였다.

우리의 인생을 굳이 일렬종대로만 세워 달릴 필요는 없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엎치락뒤치락 끝도 없는 경쟁을 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가끔은 앞뒤에 아무도 놓지 않고 일렬횡대로 가는 거다. 오로지 내가 일등인 날을 사는 거다. 기운이 나면 펄펄 뛰기도 하고, 힘들 때는 주저앉아 하늘도 한 번씩 보는 거다. 세상의 비교 선상에서 나를 빼내 주는 거다.

엉망인 모의고사 성적을 들고 와서 인생이 고단하다고 하소연하던 딸이 며칠 전 예쁜 딸을 낳았다. 지금의 상황들이 너무 행복하다며 눈물지었다. 그 꼬물이를 만날 생각에 마음이 달떠서 부질없는 열등감 같은 건 끼어들 새도 없이 기쁜 날들이다. 오로지 내가 일등인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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