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임여성이라면
내가 가임여성이라면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3.03.0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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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일전에 단양군 어느 마을에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 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고 한다. 고시 합격 정도는 돼야 현수막을 내걸던 시절을 살아서 그런지 현수막이 내걸린 것만으로도 눈이 번쩍 트이고 귀가 쫑긋 서는데, 출산장려금에 과일바구니, 꽃다발이며 출생 축하통장 개설까지 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격세지감의 큰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 까마득한 어린 시절, 작은 면 소재지였던 우리 면 김 주사의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플래카드가 학교 앞 신작로에 나붙은 적이 있었다. 잔치가 벌어지고 군수 영감까지 금일봉을 들고 방문했다며 내 일처럼 기뻐하던 마을 사람들이 플래카드 아래서 징을 치고 꽹과리와 장구를 두드리며 걸판지게 축하잔치를 벌였던 기억, 아기 낳는 일이 벼슬하는 일 버금가는 일이 되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아니 군에서까지 나서서,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축하해주는 세상이 되었다니, 참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니 딱 50년의 간격이 있다. 정부 시책으로 산아제한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각 읍면에 가족계획지도원이란 임시직 공무원을 배치해서 <셋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벽에 붙여가며 마을에 들어가 교육까지 했으니 말이다.

몇 년 후엔 `셋도 많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구호가 바뀌기도 했는데 나는 셋만 낳자는 시기에 결혼했고 아기를 낳았다. 나도 정부 시책에 따라 셋만 낳으려 했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넷째를 가지게 되었다. 어쩌겠는가?

넷째를 낳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괜스레 주변의 시선들마저 따갑게 느껴지는 자격지심에 무슨 큰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스스로 민망해하며 부끄러워하면서 문밖출입마저 삼갔던 비밀 출산 비슷한 짓을 했었다.

어느 날 미국에 살고 있던 막내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얘, 너 야만인 아니니?”

대뜸 안부도 묻지않고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말!

“응? 왜?”

“너 넷째 낳았다는 소식이 미국에까지 들린다 얘”

아이를 4씩이나 낳았다는 이유로, 졸지에 나는 야만인이 되었다.

막내 이모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주시는 대로 다 낳았던 시절이라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시에 배불러 다니던 일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다. 이모와 조카 사이라기보다 친구처럼 경쟁자처럼 살았으므로 격의 없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처지이긴 했지만, 그때부터 나는 야만인을 자처며 웃어넘기면서도 실상은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초가집들이 연기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동네의 좁은 골목길은 코흘리개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언제나 왁자지껄 시끄러웠던 그때를 기억한다. 그로부터 50여 년, 아기 낳는 일은 사명이 아닌 선택과 기피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세월이 되다 보니 마을마다 지난 세대들만 모여 있을 뿐, 아기 울음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초등학교가 여기저기서 사라졌다는 소식에 이제는 중고등학교도 문을 닫는 일이 많아졌다.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 인심이 천심이고 인력이 국력인 것을 그동안 간과한 폐해가 심각하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 줄 모르듯 어떤 아들이 빛나는 존재일지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안타깝다. 우리는 많은 가능성을 놓쳐버린 것이다.

나의 말년이 외롭지 않으며 보람을 느끼는 것 모두가 네 자녀 때문인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인걸. 내가 현재 가임여성이라면 어떨까를 생각해 본다. 나는 두말없이 전과 다름 없이 네 자녀를 낳을 것이며 풍요로운 생을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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