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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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창수 시인
  • 승인 2023.03.0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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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창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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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스무 살” 왼손잡이 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세 개의 군번과 하나의 순번 군 생활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20대에 짧게 만난 친구이나 우리 이야기는 길 것이기에 그렇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고등학교시절, 이순신 장군의 전기에 영향을 받았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와 백의종군이 가슴에 오래 남아 지금도 요동친다.

사관학교 낙방 후 징집돼 오뚜기 부대로 배치되어 일등병 때 부사관을 지원했다. 병참 주특기를 선택해 대전 학교로 이동했다. 교육 중 일정 기간이 되면 매주 외박이 가능해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갈 수 있었다. 전라선 열차에 내릴 때 그 만족감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어느 날 복귀하다 역 플랫폼에서 교복 차림의 왼손잡이 란을 만나게 됐다. 그날 이후 서대전역은 교육이 끝나는 날까지 란과의 만남을 위한 기다림의 공간이었다. 왼손잡이 란은 D여고에 다녔고 귀대 열차에서 란의 엄마가 싸주신 달달한 옥수수와 군것질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교육이 종료되어 원주로 배치받았다. 당시 군은 직접 김장을 하여 취식하는 시스템이었다. 그해 늦가을 김장 지원 병력을 인솔하라는 지시를 받고 제천까지 병력을 인솔 인계하고 복귀하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운전병의 고향이 영주라 금방 다녀올 수 있다는 말에 복귀를 미루고 풍기로 향했다. 가는 길은 비포장 황톳길이었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만 소백산 고개 정상에서 수송 트럭이 고장 나버렸다. 어둑해질 즈음에서야 차 정비를 마쳤다. 어쩔 수 없이 운전병 부모님을 만나 뵙고 복귀하자고 결론 내렸다.

마을에 도착해 딱 한 대 있는 자석식 전화로 보고했다. 부대에서는 큰 사고 없었다는 전화를 받고 안도는 했지만 문책은 피할 수 없었다. 군에 복귀하니 새벽 한시였다.

사흘 뒤 전보 통지서를 받았다. 전방 첩첩산중에 있는 군단이었다. 전출 신고를 하는데 단장님 비서가 고향 분이었다. 근무 잘하라는 당부에 더 신중히 근무를 해야만 했다. 이동 후 왼손잡이 란에게 제일 먼저 편지로 연락했다. 그렇게 안부를 전하며 서로 속마음을 주고받았다.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될 때 즈음해서 비서께서 보자고 하셨다. 공문 한 장을 주시는데 장교 모집요강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공부해서 시험 보라며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하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그렇게 두 달 후 시험은 양구고등학교에서 실시되었고 합격했다. 포병학교로 전보되어 교육 후 격동의 시대에 소위로 임관했다.

배치된 포병학교가 화천의 부대라 왼손잡이 란이 대학생 신분으로 몇 차례 면회를 왔다. 본이 틀린 종씨 누이동생으로 생각했던 나는 대학생이 된 왼손잡이 란에게 테니스 라켓을 선물했다. 나름 고민해서 사준 선물이었건만 오른손이 불편한 란을 배려하지 못했으니 두고두고 후회로 남아 있다.

당시 몇 군데 맞선을 보던 시기였다. 마지막 편지를 보내야 했다. 지금의 아내를 그때 만나 아옹다옹 살고 있다. 아주 오래된 스무 살의 기억이 떠올라 인터넷을 무심코 뒤적이다 어느 카페에서 란이 남긴 흔적을 찾았다. 딱딱한 군 생활 클래식 음악 들으라며 카세트테이프 여섯 개를 선물해 주었던 친구다. 지금도 늘어지긴 했지만 테이프를 곱게 보관하고 있다. 왼손잡이 란, 이십 대 딱 한 친구로 이름을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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