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장터 만세 함성 들불처럼 번졌다
괴산장터 만세 함성 들불처럼 번졌다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3.02.27 1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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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1운동의 현장... 충북의 장터
1919년 3월 19일 시작 1개월 동안 대규모 시위
도내 67개 3·1운동 유적지 중 장터 16곳 달해
괴산장터, 미원장터
괴산장터, 미원장터

 

 

올해는 3.1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 지 104주년 되는 해다.

나라를 잃고 쓰는 말까지 빼앗긴 민중들이 일본의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외쳤던 그날의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갔다.

그중에서도 충북의 모든 지역에서 장날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져 전국의 장터 시위운동과는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충북문화재연구원이 2020년 발간한 `충북독립운동 유족 기초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3·1운동이 일어난 충북도내 유적지는 총 67곳으로 조사됐다.

이중 장터에서 벌어진 3·1 시위지는 16곳으로 확인돼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를 시작으로 불이 붙은 시위는 4월 19일 제천 송화시위까지 1개월간 지속됐다.

특히 충북 도내 만세시위 양상을 보면 4월 2일에는 청주, 진천, 괴산, 음성, 영동, 옥천 등 도내 전역에서 만세 함성이 메아리쳤다.



# 미원장터 만세운동

청주 미원장터에서 전개된 3·1운동 만세 시위는 가장 괄목할 만한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경구, 이수란, 이용실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장날을 이용해 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했다.

그 결과 1000여명의 군중이 집결해 독립운동을 외쳤다.

이에 200보 정도 떨어진 미원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출동해 해산시키려 했으나 군중이 저항하며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원장터는 개발로 도로가 개설되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변형됐지만 미원삼거리 쪽에는 그날의 만세시위를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돼 있다.



# 청주우시장과 세교장터 만세운동

청주우시장과 세교장터의 3·1운동만세 시위는 의병장 한봉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919년 3월 7일 의병장 한봉수는 청주우시장(현 남주동과 서문동 일대)에서 1차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2일에 내수 세교장터에서 2차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세교장터는 한봉수 의병부대가 다양한 활동을 벌인 현장으로 3·1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내수보통학교 교사와 학생 80여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하다 주모자로 체포된 한병수는 징역 1년을 살았다.

중앙공원에는 한봉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공비가 있다.

또 4월 3일 영동 학산 서산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양봉식은 이강연 휘하에서 활동하던 의병 출신이다. 이처럼 의병들은 의병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3·1운동을 주도하며 영역을 넓혀갔다.



# 괴산장터 만세운동

괴산장터는 3월 15일 고종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던 홍명희가 집으로 귀가 후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괴산 장날인 3월 24일에는 홍명희 동생 홍성희의 주도하에 70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를 도화선으로 괴산군 지역에선 3월 30일 청안장터에서 3000여명이 주민이 참여해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쳤고, 4월 1일 청천장터에선 이성태의 주도로 3000여명이 만세시위를 했다.

이외에도 음성, 제천, 영동, 옥천, 충주 등 장날에 모인 주민들의 대한독립만세 시위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이처럼 충북 3·1 만세시위운동은 장터라는 공간이 중심이 됐다.

/연지민기자

annay2@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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