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억새
겨울 억새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3.02.2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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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제주 새별오름이다. 새벽하늘에 샛별이 뜬 모양처럼 외롭게 보여 새별오름이라 유래 되었다한다. 완만해 보이는 길을 선택했는데 만만치가 않다. 오르는 길엔 미끄럼방지로 야자 매트가 깔려있고 경사가 좀 있는 구간에는 옆에 안전끈을 묶어 두어 잡고 오르니 의지가 된다.

우리 일행은 아들 친구들의 엄마들이다. 이 십여 년 만나오는 사이 엄마에서 시어머니가 되고 더러는 어느새 할머니라 부르는 손주가 생겼다. 그렇듯 자식들 이야기에서 이제는 손주들 자랑이 은근슬쩍 나오고 그것도 시들하면 요즘 챙겨 먹는 건강식품 정보까지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사이다.

여행은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가 풋풋한 청춘 시절에 만난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세월 만나오며 중년을 함께 보냈다. 코로나19로 모임을 쉬는 몇 년 동안 건강이 예전만 못한 회원이 있어 여행을 무사히 다녀올지 우려되었다. 나의 짧은 생각은 기우였다. 제주에 도착해 몇군데 관광을 마친 후였다. 평소 특별히 나서지도 않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A가 총무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건강이 좋지 못한 회원을 본인이 챙기겠다며 룸메이트를 자처해 그녀를 보며 걱정만 앞세우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야트막해 보여도 오르막은 숨이 가쁘다. 일행 중에는 날마다 산행이나 운동으로 단련이 된 이는 무난히 오름을 즐겼다. 평소에 걷기를 즐기지 않는 친구는 조금 힘들어했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온몸을 많이 다쳐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오랜 병원 생활을 했던 k 그녀를 모두가 염려했다. 우리는 무리하지 말라고 힘들면 그냥 있어도 된다고 배려랍시고 어설픈 말들을 건넸다.

그녀가 걱정되어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녀 옆에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보폭을 맞추며 함께해주는 회원들 두세 명이 곁을 떠나지 않고 격려와 힘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천천히 끝까지 올라와 정상에 함께 섰다. 그러고 보니 전날 차귀도 섬을 둘러볼 때도 같은 상황인데 그녀는 끝까지 우리와 동행했다. 우리는 그녀의 집념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내려오던 발길을 멈추고 둘러보니 오름을 덮고 있는 겨울 억새들이 바람결에 일렁이며 사르르 사르르 소리를 내고 있다. 억새들도 지난여름 푸르던 시절이 있었을 터이다. 은빛 찬란하던 가을엔 한껏 사랑받으며 수많은 발길을 불러 모았으리라. 누군가의 여정 속에 추억이 되기도 하고 사진에 배경이 되어주며 오름을 아름답게 하는 한몫을 당당히 했을 터이다. 이제 세월에 순응하며 볼품없는 모습으로 엎어지고 자빠지며 그저 그런대로 오름을 지키며 오고 가는 이들을 반긴다.

그저 볼품없는 묵은 억새인 줄만 알았다. 빼곡한 억새잎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새들이 우르르 날아간다. 그리곤 되돌아와 그 숲을 다시 찾아든다. 그들에겐 추위를 피하고 몸을 가려줄 따뜻한 곳이 바로 억새 숲이다. 생명을 품어주는 자연의 거룩함을 새삼 느낀다. 이제 우리들의 모습이 억새의 모습은 아닐까. 자식들을 보듬고 이웃도 돌아보며 한 가정의 보금자리를 따뜻하게 만드는 엄마들과 닮아 보였다. 새봄의 기운이 묻어나는 한 줄기 바람이 살랑살랑 우리의 볼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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