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시간 동안
스물다섯시간 동안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3.02.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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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서울서 내려오는 길에 조금 전 헤어진 여동생에게 전화했다.

“우리 여행 가자”

“언니, 갑자기 웬 여행?”

“그냥”

몇 년 전 구강점막에 팥알만 한 크기로 뭔가 생겼다. 통증도 없고 불편하지도 않아 신경 쓰지 않고 지냈는데 그것이 조금 커졌다. 언젠가 치과 치료받을 때 불편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불편하다 싶으면 말씀하세요. 하던 의사의 말이 생각나 병원에 갔더니 지체하지 말고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서 조직검사부터 하라며 소견서를 써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인데 어안이 벙벙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혹여 나쁜 결과가 나온다 해도 애쓰지 말고 주어진 삶에 순응하자. 그런데 걱정보다는 우습게도 번거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울 갈 때 기차를 탈까, 버스를 타고 갈까, 아니면 내 차를 몰고 갈까로 고민하던 게 엊저녁이었다.

새벽 비가 내린 스산한 아침, 설거지도 팽개쳐놓은 채 게으름 피고 있는데 큰딸이 전화한다. 지청구를 끌고 울먹이며 목소리를 높여도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제대로 대꾸도 못 하고 변명만 늘어놓았다. 어제저녁 병원을 나서면서 사위에게 서울의 병원 예약을 부탁하며 식구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들통이 났다. 뒤이어 서울 사는 여동생도 걱정을 앞세우며 전화한다.

딸의 성화에 끌려가다시피 서울로 향했다. 사위가 일찍 병원으로 가서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당일 예약을 잡았다고 한다. 병원에는 여동생도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 정작 본인은 덤덤한데 온 집안이 시끄러워지고 있으니 오히려 죄인이 된 것처럼 민망하다.

무겁던 시간이 무색하게 진료 결과는 싱겁다. 서둘러 수술할 만큼 걱정할 일도 아니라고 한다. 주사로 약물을 주입해 부위를 줄여 수술한 다음 조직검사를 하면 된다고 한다.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식구들이 그나마 다행이라며 낮 빛이 환해진다. 예약날짜를 잡고 병원을 나서자 긴장이 풀린 딸과 여동생이 눈물을 쏟는다.

소견서를 받은 시간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이 시간까지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내일이 더 아득해지는 하루하고 한 시간을 출렁이며 떠돌았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무뎌지고 견뎌내면서 숙성시키던 삶이다. 기댈 곳 없이 바람을 맞던 날들은 아직도 표지석처럼 남아 쑤시고 아프다. 문득, 거리를 잴 수 없는 그리움이, 별처럼 아득한 것들이, 확신하지 못해 불안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어둠을 뚫고 한꺼번에 밀려든다. 다시 어제의 날처럼 시간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돌아눕게 살면 후회만 남을 생이다. 황당한 일을 겪고 나니 길이 보인다.

“언니, 여행 가자”

피붙이의 지난했던 삶을 떠 올린 듯 젖은 목소리로 말하는 동생의 말에 운전하는 딸이 주저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살라며 추임새를 넣는다. 어제와 오늘, 내일이 넘나들고 잡념이 혼재된 스물다섯 시간이 온전히 어둠 속으로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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