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정치가 낳은 `부끄러운 역사'
삭막한 정치가 낳은 `부끄러운 역사'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3.02.1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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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1969년 4월 8일 국회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발의한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다.

의원 152명이 투표해 과반인 89명이 찬성했다. 집권당인 공화당 의원 100명 중 40명 이상이 야당에 동조한 결과였다.

해임안 저지를 당론으로 정했지만 국회 경시 발언을 일삼은 각료를 좌시할 수 없다는 기류가 투표에 반영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격노했다. 1주일 내에 앞장 선 반당분자들을 색출해 당에서 몰아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양순직·예춘호·박종태·정태성·김달수 등 쟁쟁했던 중진의원 5명이 제명당해 정치판을 떠났다. `4·8 항명파동'으로 불린다.

2년 후인 1971년 10월 8일에도 항명파동이 벌어졌다. 신민당이 북침훈련을 받던 684부대원들의 무장 탈영으로 발생한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물어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을 발의했다.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의 구도에서 과반 찬성을 얻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찬성 107, 반대 90, 무효 6표로 가결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공화당 의원 중 최소 18명이 야당에 가세한 결과다.

박통의 대응은 2년 전보다 가혹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주동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고 의원 23명이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다. 김성곤 길재호·김진만 등 당을 쥐락펴락하던 4인방도 이 때 몰락했다.

박정희는 두 차례 모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두 장관이 자진 사퇴하는 방식으로 정리함으로써 야당에 승리(?)를 안겨줬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무위원이 탄핵 소추됐다. 지난 8일 민주당이 발의한 이상민 행안부 장관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대통령실은 “의정사에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며 야당에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를 초래한 책임에서 대통령은 자유로울까?

이 장관은 참변을 예방하지 못한 책임보다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사후의 무능이 더 큰 과오로 지적된다. “경찰과 소방 인력을 배치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에서 “나라고 폼나게 사표를 내고 싶은 맘이 없겠나”에 이르기까지 유가족들의 가슴을 후벼판 발언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론은 물론 보수 언론들도 대통령실에 이 장관 해임을 주문할 정도였다. 세월호 참사 때 136일 동안 유가족들과 함께 진도 팽목항을 지키며 본분을 다한 후 사임한 이주영 전 해수부 장관과 비교되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이 장관 해임안이 의결됐을 때다. 여당과 국정조사에 합의하자마자 주요 조사 대상인 장관 해임안을 낸 민주당의 행태가 부적절하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 거부권이 아니라 해임을 결단하고 이 장관을 둘러싼 소모적 정쟁을 매듭지었다면 불통 이미지를 희석하고 정국 안정에도 기여했을 것이다.

해임안과 탄핵안 의결 모두 실질적으로는 민주당 작품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국회의 결정이다. 독자적 의결이 가능할 정도로 민주당이 국회 절대 의석을 차지한 것도 국민이 선택한 결과물이다. 대통령이 국회 의결 사안을 거대 야당의 횡포로만 치부한다면 삼권분립의 정신과도 배치된다는 얘기다. 국민의힘은 만년 소수정당에 머물 것인가?

박정희는 분을 삭이지 못하면서도 거부권 행사를 포기했다. 부정적 여론을 의식하기도 했겠지만 철권통치에도 야당과의 최소한의 공생이 필요하다는 현실 인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작은 양보로 더 큰 과실을 얻어낼 수 있다는 실리적 판단도 했을 터이다.

민생이 파탄나는 위중한 시기를 맞고도 낯뜨거운 정쟁으로 날을 새우는 정치판이다. 탄핵공방까지 더해졌으니 민생정치는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박통 시대의 `항명 파동'을 떠올린 것은 그 때보다 더 삭막한 악다구니 정치를 봐야하는 답답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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