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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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창수 시인
  • 승인 2023.02.0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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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정창수 시인
정창수 시인

 

코로나로 3년간은 가족이건 친구이건 서로 위해 접촉을 자제하는 서글픈 세월이 우리의 삶을 통째로 묶어 두었다. 가장 가까이 만나야 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랬으니 돌림병이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인지 일깨워준 비록 우리나라 안에서가 아닌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임이 틀림없다.

지난해 직접 겪은 큰 사건이 둘이나 있었다. 한 건은 다니던 직장에서 발을 헛디뎌 왼쪽 발바닥뼈가 골절되어 무덥던 여름날 충주 K 병원에 입원 한 일이고, 또 한 건은 30년 지기 친구인 불정이 갑자기 세상을 등진 일이다. 병원 신세라 보고 싶어도 갈 수 없어 친구의 마지막 뒷모습도 보지 못한 것이 내내 가슴 아프다. 괴산 불정이 고향이라 자주 동행해 같이 갔던 그 길은 친구와의 향수가 남아있다. 눈감고도 갈 수 있는 그곳이 불현듯 머리를 스친다.

1992년 서울에서 충주로 발령받고 오면서 불정을 알게 되었다. 지방에 내려와 문단 활동을 하려고 업무를 맡는 사무국장을 만나야 했는데 그때 불정이 사무국장이었다. 그가 단체 가입도 주선해 주고 문단의 여러 어른께 인사시켜 주었다. 나이가 동갑이라 불정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시간 날 때마다 주변의 유적이나 시비(詩碑)를 견학하러 다녔다. 불교신자였던 그의 해박한 지식 덕분에 충북 전역을 답습하며 성지를 순례했다. 알려지지 않은 산이며 들, 바위에 새겨진 삼국시대 불상을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충주에는 이렇다 할 시 동인의 활동이 없었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김 시인은 시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셋이 잘 어울리면서 삼초라는 별명이 붙었다.

우리는 1995년 여름날 향군회관 앞 능수버들 아래 막걸리 집에서 시 동인을 결성하기로 약속하고 동인지를 출간하자고 다짐했다.

당시 286 컴퓨터를 가지고 있던 나는 필요한 동인 회칙과 동인 결성에 필요한 정보, 행정에 관한 사항을 책임지고 동인들의 작품을 모아 편집했다. 김 시인은 동인이름을 `사람과 시'로 명명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시인들 주거지나 근무지를 찾아다니며 동인을 결집했다.

늦가을 즈음 시집 한 권 분량이 되었고 제목을 `꽃을 피워 예까지 오도록'이라 명명했다.

서울에 안면이 있던 북토피아에 부탁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출간기념 막걸리 파티를 했던 기억도 새롭다.

불정 친구가 작년 4월 27일 음성 오일장 날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삼 년 만에 서로 대면했다. 자주 들렸던 장터 국밥집에서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정도 코로나에 감염돼 나은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면서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가 있다며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취업도 했단다. 산림조합에서 하는 소나무 수관주사를 하러 다니는 일이라고 했다. 홀로 산지 꽤 오래된 친구라 걱정이 컸다. 병치레를 하고 나면 먹는 것을 잘 챙겨 몸보신을 해야 하는데 해줄 수 있는 말은 잘 먹어야 한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친구는 막걸리 한 사발 먹고 잔다고 자랑하듯 술잔을 들고 입술을 훔쳤다.

그렇게 한 달에 두어 번 장날 만나자며 다음 장에는 막걸리를 사겠다고 오겠다며 철석같이 약속하고 충주로 갔는데 그날 이후 전화를 해도 불통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 김 시인에게 연락했더니 서울 A 병원에서 뇌종양 제거 수술을 하고 청주 누이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요양병원에 있는데 깜박깜박한다고 전해주었다. 그즈음 나 역시 골절되어 수술한 상태라 친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끝내 못보고 보낸 그 친구가 더 그립다.







■ 필진 소개=한국문인협회회원. 한국문예저작권협회 회원. 충주문인협회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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