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3.02.0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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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불교의 대표적 가르침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일체유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불원천리(不遠千里)라는 말이 있다.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이 천 리 밖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오면 만사 제쳐놓고 천 리 길이 멀다는 불평불만 없이 기쁜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가게 된다. 바로 천 리 길을 멀다고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 즉, 불원천리(不遠千里)의 마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불원천리와 반대의 경우를 의미하는 지척천리(咫尺千里)라는 말도 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집 앞 카페까지 찾아와서 만나자고 하면, 지척의 가까운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진다. 심하면 갑자기 몸이 아프기 시작하는 등 외출하기 곤란한 상황들이 저절로 발생한다. 바로 지척천리(咫尺千里)의 마음 때문이다.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천 리길이 가깝게 느껴질 뿐 실제적인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일은 없다. 이 세상은 질량 보존의 법칙이 분명하게 지켜지고 있고, 인과는 분명하다. 따라서 천 리 길을 멀게 생각하건 가깝게 생각하건 물리적 거리가 짧아 지는 일은 없다.

또 고속버스를 타고 갈 경우, 천 리 길을 가깝게 여긴다고 해서 요금이 절감되는 일도 없다. 다만 천 리 길이 멀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는, 고속버스 요금이 3만 원이 넘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불원천리와 동일한 맥락의 “마누라가 예쁠 때면 처가 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마누라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우면 평소 관심조차 가지 않던 처가 집의 말뚝이 고맙고 예쁘게 보여서 절을 할 수도 있다는 속담이다. 그 반대로 마누라가 미워지면 평소 사이좋게 지내던 장인 장모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어색해지고 싫어질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처럼 가깝고 멀고 친하고 소원한 느낌을 결정짓는 것은 지척 및 천 리 등의 물리적 거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또 마누라나 처가 집 말뚝 등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좋음과 싫음 및 절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에 멀고 가까움, 친함 소원함 등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른 시절 인연에 따라 펼치는 일체유심조의 결과물일 뿐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 어떤 선입견에도 물들지 않은 채 대소유무와 원근친소 및 고저장단 등 양변(兩邊)을 여읜 텅 빈 무심으로 그 어떤 주의 주장이나 이념 등에도 집착하거나 사로잡히지 않은 가운데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맞게 대소유무와 원근친소 및 고저장단 등을 자유자재로 선용할 줄 알아야 한다. 0점 조정된 마음으로 바른 생각과 바른말과 바른 행동을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오토매틱 자동차처럼 애써 작위적인 생각과 행위들을 억지로 하지 않는 `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살게 된다. `나 없음'의 지공무사한 마음을 회복하지 못한 채 공동의 선을 외면하는 삶,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삶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소멸돼야 한다. 그리고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맑고 밝은 투명한 세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지상낙원인 대동 사회가 건설돼야 한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삶이여! 자신의 주견을 텅 비우고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서 성령의 도구로 쓰이는 삶이여!! 하늘의 뜻을 따르는 순천(順天)의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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