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캘리그라피
아버지의 캘리그라피
  •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 승인 2023.01.2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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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강석범 충북예술고 교감

 

가끔 TV에서 `그때 그 시절', `대한 뉘우스' 같은 예전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할 때가 있다. 지금 보면 다소 촌스럽기도 하지만 그 모습들은 당시 가장 보편적인 우리네 일상이었다.

명절 때는 오래된 명절 풍속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기차나 버스터미널에 구름처럼 모여든 귀성객의 모습은 지금은 보기 힘든 귀한(?) 장면이기도 하다.

요즘은 자가용 장거리 이동이 가장 큰 고민이지만 예전에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나 버스 등 티켓 예약이 가장 우선되는 걱정이었다.

좌석표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고 입석(서서 가는 탑승 표)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역 광장에 몇 시간씩 줄을 서는 일은 보통이었고 새벽부터 나와 자리를 잡고 진을 치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는 오랜 세월 철도 공무원으로 지내셨다. 철도는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고 귀성객의 이용이 제일 많아 명절엔 일종의 `비상근무' 체제로 전환된다.

때문에 아버지는 `특별 비상근무'로 인해 명절 당일 가족들과 같이 있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원래 손재주가 뛰어나고 특히 글씨를 아주 잘 쓰셨기 때문에 당시 컴퓨터나 전산프로그램이 없던 그 시절 직장에서 손재주가 필요한 많은 부분을 아버지가 담당하셨던 걸로 알고 있다.

명절과 관련해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특별수송열차 시각표' 제작을 위해 퇴근도 못 하시고 몇 날 며칠을 그 일에 몰두하셨던 기억이다. 일반적으로 열차 시각은 해당 역 구내 안내판에 쓰여있지만 명절처럼 특별한 날은 10여 분 간격으로 열차를 배치해야 해서 임시 시각표를 만들어야 했다. 한마디로 가로세로 수 미터씩 되는 대형 옥외 간판을 만드는 일이다.

나무 합판을 이어붙여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거기에 검은색과 붉은색 페인트를 시너와 섞어가며 귀성객들이 잘 알아볼 수 있게 멋지게 열차시간표를 써 내려간다.

숫자를 쓰는 게 대부분이지만 사실 숫자를 예쁘게 쓰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글자의 굵기도 일정해야 할뿐더러 아라비아숫자를 반듯하고 일관성 있게 쓰려면 내 경험상 뛰어난 조형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 m씩 되는 글자판이 정돈되지 않아 오합지졸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엔 컴퓨터로 글자를 출력해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당시는 정말 사람의 손으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 어디든 손재주 있는 분들이 바쁘고 일이 많았다.

한 번은 역 광장에서 아버지가 만들었다는 까마득한 높이의 열차 시각표를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니 `잘 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숫자는 정말 예쁘게 쓰셨다'라고 감탄했었다.

아버지는 평생 집안 애경사 봉투 쓰기를 도맡아 하시고 거실 큰 달력에 자식들의 생일, 제사 같은 중요한 행사를 멋들어지게 써놓는 등 단정하고 바른 글씨 쓰기를 즐겨 하신다.

어쩌면 생활 속 `민체'일수도 있고 그저 개인의 서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기준으로 보면 아버지는 분명 멋진 캘리그라퍼다. 각 쓰임에 맞게 글자체를 다양하게 바꿔가며 글자형식과 내용도 만들어 가신다. 성품만큼이나 반듯한 글씨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요즘 연세가 있으셔 그런지 서체 끝에 힘이 달린다. 그러나 그조차도 내겐 지금까지 보아온 글씨 중 가장 멋진 캘리그래피 글꼴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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