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의 삽화
눈 내리는 날의 삽화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3.01.1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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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올겨울엔 눈이 많이 내렸다. 오래 묵은 노송 위, 주택가 지붕이나 장독대, 골목길 산수유나무에도 각각의 모양 따라 눈이 쌓이고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모습을 보면서 그 풍경에 감탄하지 않는 이들이 있겠는가. 오래전 소복이 쌓이는 눈을 보며 친구는 솜사탕 같다고 했는데,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떡가루가 생각났었다.

불린 쌀을 디딜방아에 빻아서 고운 채로 치면 보드라운 흰 쌀가루가 마치 소복이 쌓인 눈 같았다. 눈이 내리면 농촌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어느 집에서 곱게 빻은 쌀가루에 밤, 대추, 콩, 호박 말랭이 등을 섞어 마구설기라도 쪄내는 날이면 떡 한 대접 수북이 담겨 이 집 저 집에 전해졌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 아이들은 입맛만 다신 떡이 아쉬워 엄마를 졸라대곤 했었다. 먹을거리가 곤궁하던 시절을 경험한 이들은 하얀 눈을 보면 자주 먹을 수 없던 귀한 음식인 시루떡을 떠올릴 터이다.

넉넉하진 않아도 마음마저 옹색하진 않았던 것 같다. 유년 시절 눈이 내리면 마냥 즐거웠다. 차 한 대 지나갈 만한 비포장도로 완만한 언덕길을 눈썰매장으로 만드는 일은 시골 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을이 크지 않아도 그때는 아이들이 많은 시대였다. 뜻하지 않은 놀이동산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그 놀이를 즐기지 않겠는가.

눈이 다져져 빙판이 되어 반들반들 해지고 아이들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눈썰매타는 즐거움에 빠져있었다.

어른들이 지나다 “길을 이리 만들어놓으면 어쩌냐.” 하고 호통을 치지만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를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눈을 보고 좋아서 호들갑 떨던 마음도 옛일이 되었다. 하얀 눈이 곱게 내려앉은 경치를 보면 마음을 빼앗기지만, 곧이어 드는 생각이 길이 미끄럽다는 걱정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지난달에 눈이 여러 차례 내렸다. 눈 오는 날은 밖을 자주 내다보게 된다. 눈이 쌓인 풍경을 잠시 보다가 금 새 마음이 무거워졌다. 관리실 직원들이 아파트 입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넉가래를 들고 눈을 치우고 있었다. 늘 마음으로만 눈 치우는 일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날은 아침부터 내리는 눈이 오후가 되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망설이다 넉가래를 들고 눈 치우는 일에 합류해 겨우 삼십 분 정도 눈을 치웠는데 매우 힘들었다. 관리실 직원들은 정문 밖 인도에까지 오솔길처럼 길을 내고 염화칼슘을 뿌리곤 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바빠 보였다.

이즈음엔 눈을 보면 아름다운 삽화 하나가 떠오른다. 은퇴하신 후에 주차관리일을 오래 하셨던 어르신이 이웃에 계신다. 팔순이 되도록 일을 열심히 하시다 지난해 그만두시고 지금은 성당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하시며 사시는 분이다. 몇 해 전 제천지역에 폭설이 아주 많이 내린 때가 있었다.

어르신이 아침에 주차장 앞에 눈을 치우려고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는데 눈이 모두 치워진 상태라 어리둥절하셨다. 알고 보니 전날 밤늦게 아들과 며느리가 눈을 치우고 들어가고 새벽에 딸, 사위가 나와서 밤새 내린 눈을 치우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 시대에 보기 드문 효를 다하는 젊은이들이라는 생각에 따뜻하고 아름다운 삽화 하나로 내 마음에 저장되었다.

오늘도 눈이 내렸다. 내일부터는 기온이 떨어져 강추위가 예상된다고 하지만 우리의 이웃들이 마음만은 따뜻한 겨울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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