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해의 수궁가
토끼해의 수궁가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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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판소리는 인류문화에서 우리 것이 유일하다. 무대에는 장단을 맞추어주는 고수와 더불어 2명이 등장하나, 혼자 전체의 공연을 진행하는 초인간적 기량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판소리는 춘향가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흥보가 등 다섯마당이다. 각각의 마당마다 차이가 있으나 완창을 하기까지 3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공연을 이끄는 소리광대는 사설과 아니리로 불리는 소리와 연기에 해당하는 발림에 이르기까지 온몸과 오랜 기간 동안 갈고 닦은 공력을 총동원해야 하는 고난의 예술이다.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가장 관심이 있는 판소리 마당은 `수궁가'인데, 잘 알려진 대로 토끼가 주인공으로 종횡무진 활약한다.

`수궁가'는 토끼가 주인공임에도 타이틀 롤을 따내지 못한 유일한 판소리 마당이다. `춘향가'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야기이고, `심청전'은 효녀 심청의 이야기, `흥보가'는 착하지만 가난한 흥부와 욕심많은 부자 놀부의 대립 구도로 진행된다.

중국의 고전소설 삼국지를 토대로 하는 <적벽가>야 그렇다 해도, 주인공 토끼의 자리를 용왕이 사는 `수궁'이거나 `별주부전'으로 불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간혹 `토끼전'으로 호칭되기도 하지만, 정통의 자리로 대접받지 못한다.

`수궁가'는 불치의 병에 걸린 수중 용왕의 특효약으로 토끼의 간이 필요하다는 처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다에 사는 여러 신하 가운데 별주부 자라가 육지로 나가 토끼를 수중으로 데려 오고,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인 토끼가 간을 두고 왔다고 속이면서 위기를 극복한다는 내용까지를 `수궁가'의 전체 줄거리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건너 산 바위틈에 묘한 짐승이 앉었다. 두 귀는 쫑긋. 두 눈 도리도리. 허리는 늘씬. 꽁지는 묘똑. 좌편 청산이요 우편은 녹수라. 녹수청산의 애굽은 장송. 휘늘어진 `양류楊柳-버들' 속. 들락날락 오락가락 앙그주춤 기는 짐승 분명한 토끼라.'

박봉술류 `수궁가'에서 육지 도전에 성공한 별주부 자라가 토끼를 처음 본 순간을 표현한 대목인데, 이에 앞서 토끼 화상(畵像)을 그리는 대목에 등장하는 토끼는 훨씬 더 화려하다.

`천하명산승지강산 경계 보던 눈 그리고. 두견 앵무 지지울 제 소리 듣던 귀 그려. 봉래방장운무중(蓬萊方丈雲霧中-신선이 놀던 구름속)의 냄새 맡던 코 그리고. 난초지초 온갖 향초 꽃 따먹든 입 그리고. 대한엄동설한풍의 방풍(防風)하든 털 그려. 만화방창화림중(萬花方暢花林中-만물이 한창 피어나는 가운데)의 팔팔뛰던 발 그려. 신농씨 상백초(嘗百草-백초를 맛봄) 이슬 털던 꼬리라.'

`수궁가'의 토끼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용왕을 속이면서 수궁을 탈출하는 1차적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토끼의 위기는 육지에 성공적으로 돌아왔음에도 그치지 않는다.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또다시 겪는데, 한 번은 인간이 쳐놓은 덫에 걸리는 것이고, 두 번째로 하늘을 나는 독수리에게 잡혀 먹이가 될 처지가 된 것이다. 토끼는 이때에도 파리떼를 이용해 악취를 풍기게 하여 썩은 몸으로 변신하거나, 독수리의 욕심을 자극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도합 세 차례나 거듭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한 토끼는 천수를 누린 뒤 달에 올라 방아 찧는 토끼의 전설이 되었다는 것이 판소리 `수궁가' 해피엔딩의 대단원이다.

서양력 기준으로는 2023년 새해가 어느새 18일이 지나고 있으나, 고유명절인 설날이 지나야 비로소 새로운 기운을 깨닫게 되는 전통은 어쩔 수 없다. 설날이 지나면서 토끼해 계묘년이 본격 시작된다.

여러 가지 위기가 경고되는 가운데 맞이하는 새해가 유난스럽다.

그럼에도 물 속, 사람 속, 날짐승의 탐욕 속에서 살아남은 판소리 `수궁가'의 슬기로운 토끼 이야기가 남아 있고, 새해가 토끼의 해이어서 위로로 삼는다. 다만 위기가 거듭되고, 그 때마다 속임수를 쓰며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 예고되고 있어 어지럽다.

설날은 신일(愼日). 더 경건함은 해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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