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기연 시인
  • 승인 2023.01.16 2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시인
한기연 시인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다. 일본의 전통 숙소인 료칸에 마련된 노천탕에 얼굴만 내밀고 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혼자뿐이다. 겨울이지만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춥지 않다. 주변은 고요하고 적막감이 감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숨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흐른다.

두 달 전, 큰아들과 일본으로 자유여행을 가기로 일정을 맞췄다. 항공권 예매부터 숙소까지 모든 것은 아들이 알아보고 비용은 전부 내가 냈다. 장성한 아들이 함께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며 경비는 책임져야 한다는 지인의 말에 수긍하며 즐겁게 준비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해외여행을 다니며 일상의 피로를 풀었었는데, 2년 정도 멈춘 시간이었다.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기다리는 시간을 더 즐기는 편이다. 여행의 설렘을 충분히 만끽하면서 보내다 보니 그날이 다가왔다.

가기 전에 우선 올해 계약 예정 중인 학교에 제출할 채용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를 받고 발급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 매년 하던 대로 기존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끝내고 일주일 뒤 여행에서 돌아오면 찾으러 오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상증세가 발견돼서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가서 혈액검사와 CT 촬영까지 마쳤다. 설상가상으로 어제 먹은 것이 안 좋았는지 구토까지 한 후 약을 처방받고 동서울행 버스를 탔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빨라서 하루 전에 인천공항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공항까지 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다. 아들도 감기에 걸렸다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 걸려서 숙소에 도착했다. 간단히 사 온 음식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새벽 4시에는 숙소에서 출발해야 해서 바로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한숨도 못 자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출국 수속은 빠르게 진행됐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후쿠오카는 제주도처럼 따뜻했다. 라멘은 꼭 먹어봐야 한다며 유명한 맛집에서 문 열기를 기다려 들어갔다. TV에서 자주 보던 공간 구성으로 혼자서도 음식에 집중해서 먹을 수 있도록 칸이 나누어져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맛있다고 했는데, 입맛에 맞지 않아서 그런지 별로였다. 검사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무엇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었다. 설사로 화장실만 들락날락하다가 온천으로 유명한 유후인으로 이동하는 두 시간을 용케 버텼다.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의 료칸은 마음에 들었다. 이부자리도 푹신하고 편안했다. 무엇보다 돌멩이로 만들어진 노천탕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병원에서의 정밀검사에 대해서는 아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탕에 혼자 앉아 있노라니 의사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돈다. 소변에서 보인 혈뇨와 단백뇨는 신장 이상의 징후란다. 여행 중에도 틈만 나면 그 단어를 중심으로 검색했다. 어이없게도 나는 죽을 날 받아 놓은 시한부가 되어 있었다.

나흘간 여행은 최악이었다. 두려움은 극도의 공포감으로 다가왔고, 삼 년 전 암으로 죽은 친구가 자꾸 떠올랐다. 친구는 죽기 전에 아픈 몸으로 그해 여름 가족여행을 떠났다. 병문안을 하러 갔을 때 퇴원을 서두르며 여행을 간다는 말에 화를 내며 말렸다. 마지막을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간절함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나와 견줄 일은 아니지만 나 또한 아들과의 여행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검사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며칠간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건져진 기분이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가졌던 그 마음 잊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을 덜어냈다.

온천에 담갔던 온기와 겨울바람의 냉기가 공존하던 눈물로 얼룩진 나흘을 기억하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