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생각
오빠 생각
  • 연서진 시인
  • 승인 2023.01.0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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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연서진 시인
연서진 시인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점심을 놓쳤다. 허기가 밀려와 커피를 타서 손님이 주고 간 곰보빵과 같이 먹었다. 조금씩 떼어먹다 보니 어릴 때 나를 돌봐 주던 오빠가 생각난다. 세 살 터울인 오빠는 어려서부터 먹을 것이 생기면 반을 남겨 내게 주었다. 학교 급식 빵도 예외는 아니었다. 급식으로 나오는 커다란 곰보빵은 적당히 달고 부드러운 게 무척이나 맛있었다. 나는 늘 오빠가 남겨 주는 빵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먹었다.

그 무렵의 나는 껌딱지처럼 오빠를 따라다녔다. 친구들하고 노는 것보다 오빠 따라다니는 것이 더 좋았다. 오빠는 구슬과 딱지가 많이 생긴 날이면 친구들에게 얼마의 돈과 바꿔 사탕 등 군것질거리를 사주었다. 통에 가득 담긴 딱지와 구슬만 보면 신이 났던 까닭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곧장 5학년 교실로 향했다.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날마다 가서 “오빠! 빵 줘!” 하고 힘껏 외쳤다. 창문에 턱없이 모자란 키에 발꿈치 들고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창틀에 매달려 커다란 목청으로 빵 달라고 노래했다. 후에 들어 보니 당시 선생님은 제발 동생 좀 그만 오게 하라고 하셨고, 친구들에게도 적잖이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오빠는 한 번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 후로 오빠 친구들은 날 보면 `오빠 빵 줘, 라고 불렀다. 당시에 나는 부모님의 불화로 혼자 있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집착하듯 오빠를 따라다니며 떼를 쓰고는 했다. 그런 나를 오빠는 부모님이나 되는 것처럼 챙겨줬다.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12살 아이였음에도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오빠였다.

그랬던 오빠가 변한 건 사춘기 무렵이었던 것 같다. 기타 소리와 알 수 없는 팝송이 집안에 흐르기 시작했다. 오빠가 음악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와 함께하는 시간은 줄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오빠는 본격적으로 밴드부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하얀 피부에 얼굴도 잘생긴 오빠는 인기가 많아 여학생들에게 받은 편지는 항상 서랍에 가득했다. 음악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는 오빠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기타를 치는 오빠를 따라 나도 기타를 배우고 함께 음악을 들으며 꿈을 키웠다. 오빠의 연주는 추운 겨울 구들장처럼 따뜻한 온기로 감싸 주었고, 오빠와 부르던 노래는 봉천동 언덕배기 하늘 별빛 사이로 울려퍼지고는 했다.

결혼하고 삶에 지쳐 일상이 털실 뭉치처럼 마구잡이로 엉킬 때 늘 꿈으로 남겨 두었던 공부를 시작했다. 방송대 4년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 합격을 오빠에게 제일 먼저 알렸다. 누구보다 기뻐하며 잘했다고 칭찬하며 응원해 주는 오빠와 언니의 들뜬 목소리에 지난가을 문경에서 보았던 노란 은행잎 향기가 묻어났다.

성당 4050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오빠와 마라카스 리듬에 율동하며 노래하는 언니는 병원 혹은 길에서 버스킹을 통해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며 행복 나눔을 하고 있다. 남편은 종종 오빠와 나를 보고 남매가 나이 들어도 똑 닮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웃으며 우리 남매의 유전자가 좀 강하다고 말하곤 한다.

두 해 전에 크게 다쳐 수술하고 재활 중인 오빠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 이순(耳順)이 되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사랑의 하모니가 더욱 풍성하고 온전해지기를, 비가 오면 세상이 짙어지고 한층 푸른빛을 띠는 나무처럼 더욱 빛나는 청춘이길 누구보다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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