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세 번의 종소리
서른세 번의 종소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0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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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세상은 종소리로 열리며 닫히고 있다. 하루도 중단되지 않고 있으나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종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종소리는 언제나 세상의 새로운 문을 여는 의미심장한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경종(警鐘)에 게으르다.

제야(除夜)의 종은 해마다, 해를 넘기며 새로운 한 해를 희망하기 위해 거의 모든 도시에서 울린다. 심지어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 복판 보신각에서 열리는 타종식은 전파를 타고 생중계되므로 종각이 없는 두메산골일지라도 종소리는 방방곡곡 스며들게 마련이다.

제야의 종은 어김없이 서른세 번 타종된다. 대체로 각 부분 권력의 수장들이 밤잠을 거르면서 한 자리에 모여 평소에는 굳게 닫혀있던 종각의 문을 열고 1월 1일 0시에 맞춰 종을 치는데 그중 33번 타종의 의미를 아는 이는 몇이나 될까.

우리 민족은 숫자 33을 유난히 좋아한다. 탄생설화가 담긴 삼신할미의 보호와 삼세번이 강조되는 실수와 잘못에 대한 반성, 재도전의 용기를 거듭 담는 숫자 33의 가장 큰 의미는 인간에 대한 존엄에 있다.

인간의 척추는 33개의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직립의 인간을 곧추세우고 두 발은 대지를, 머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게 한다,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의 세계를 상징한다. 세른 세 개의 척추 마디마디를 근간으로 오장육부가 갖춰지면서 비로소 사람의 형상과 기능, 즉 생명을 이루게 된다.

서른 세 번의 타종은 그 순간순간마다 척추의 마디마디에 울림으로써 사람됨의 근간을 하나하나 일깨우는, 말 그대로의 `경종(警鐘)'이 아닐 수 없다.

섣달 그믐인 제야(除夜)는 `무릅 꿇고 하늘에 기도하는 밤'의 의미가 있다. 그날 종각에 나와 자랑스럽게 타종하는 권력자 또는 지배자들은 모두 사람에 대한 무한대의 가치 존중의 의미를 세른 세 번의 종소리에 담아 타종했으리라 믿고 싶다.

세상의 모든 공간은 사면팔방에 두루 속해 있다. 사면은 동,서,남,북의 4방위를, 팔방은 건방(乾方), 감방(坎方), 간방(艮方), 진방(震方), 손방(巽方), 이방(離方), 곤방(坤方), 태방(兌方)의 여덟 방향을 말한다. 인간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사면팔방을 벗어나 살 수 없다. 서른 세 번 타종은 4면과 8방을 곱해 지상에 망라된 32방의 땅의 숫자에 하늘 하나를 더해 33으로 세상의 완성된 공간을 울리는 것이다.

섣달 그믐밤 0시에 시작되는 제야의 종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이미 새해 첫날의 시작을 알린다. 종각에 직접 모여 환호하거나, TV앞에서 소리와 모습을 보며 경건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은 한결같이 `더 좋은 날'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을 것이다.

몸 안의 모든 척추 마디마디가 어긋나지 않고 튼튼하게 제 역할을 할 것이며, 미리 정해 놓은 제각각의 바람이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중심을 잘 잡고 버티는 새해를 소망한다.

사면팔방 어디를 향하거나 어느 곳에 머물고 어떤 장소에서 무슨 일을 할지라도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하면서 매일매일 집으로 돌아오는, 결코 특별하지 않은 일이 일 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지켜지기를 서른 세 번의 종소리는 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여운이 길더라도 종소리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종소리는 소멸되거나 없어지는 건 아니다. 각자도생과 복잡하고 시끄러운 다툼. 분열과 불평등에 찌들면서 종소리의 의미를 지우고 있을 뿐이다.

`처음 모든 게 두려웠던 날/ 한숨조차 힘겨웠던 날/ 이젠 아득히 떠나버린/ 그날들 날들이여/ 조금 세상에 익숙해지고/ 문득 뒤돌아 생각해 보면/ 두 번 다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날들이여/ /(중략) 빛나던 순간/ 희미한 순간/ 그 모든 찰나들이/ 나의 삶을 가득히 수놓았음을/ 지금 이 순간도/ 나의 빛나던 찰나여/ 이미 지나버린 찰나여/ 나의 영원한 찰나여/ 지금 빛나는 순간이여.'

최백호 노래 `찰라'를 자꾸 듣게 되는 서기 2023년의 시작을 희망으로 말하기 두렵다.

간절한 희망의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지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그래도 견뎌야 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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